네게 파란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

미라벨과 레네트의 네 가지 모험-에릭 로메르

by 김지현

자연만큼 우리를 매혹시키는 게 또 있을까? 매혹당하면 매혹하는 대상을 노래하고 싶어지는 법, 나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나무와 햇빛과 바람을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어떻게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즘은 대부분 산과 나무와 꽃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러나 나는 사진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매체라고 보지 않는다. 카메라는 손쉽게 자연을 재현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자연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서 자연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자연과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반드시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의 고유한 느낌을 통과해서만 표현된다. 그런데 사진은 기계의 재현력에 의존하는 만큼 촬영자의 주관적 느낌을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풍경사진이 그렇다. 인물사진의 경우에는 사진이 찍히는 장소,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 파사체의 표정과 태도 등을 통해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자연은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표정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일출일몰 사진들이 그렇게 탄생한다. 카메라가 좋아질수록 때깔은 좋아지지만, 그 때깔이 느낌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반면에 시와 그림은 사물의 외관을 똑같이 모사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이 사물에 대해 갖는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문제는 그림 그리고 시 쓰는 게 사진 찍는 것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는 특별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아이들은 대부분 그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른이 되면 소수에게만 그런 재능이 허락된다. 나는 아이 때조차도 그런 재능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자연에서 느끼는 매혹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 속을 거닐 때마다 내가 느끼는 매혹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나는 시인들을 흉내 내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할 시어들을 찾으려 애써보지만 머릿속에서는 진부한 단어들만 맴맴 돌뿐이다. 하는 수 없이 학교 때 배운 시들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이 때는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린다. 시와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면서 그 재능이 사라지는데, 시와는 달리 서툰 그림도 완성만 시켜놓으면 다 좋다. 문제는 완성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봄에는 그림 도구를 들고 산으로 나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 사이의 간격은 멀기만 하고, 도화지 한 장을 채우는 건 어찌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것으로 그날의 사생을 마치고 말았다.

정작 오랫동안 해온 영화로는 그것을 표현하려고 시도조차 해본 적 없다. 잠깐씩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시를 써보려고 할 때처럼 진부한 생각들만 났다. 내가 못 한다면 남이 잘 한 거라도 보며 만족하고 싶었지만, 자연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라는 제 죄 소위 경치 좋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찍은 것들로, 자연에 대한 과잉된 감상으로 뒤덮여 있거나, 관광엽서 같은 자연 풍경에 기대 서사와 주제의 빈약함을 메우려는 얕은 수가 드러나는 실망스러운 것들뿐이었다. 역시 카메라로는 자연에서 느낀 매혹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 에릭 로메르의 <미라벨과 레네트의 네 가지 모험>을 보게 됐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는 내가 막연히 표현하고 싶어 하던 자연의 매혹이 모범 답안처럼 표현돼 있다.


모험


<미라벨과 레네트의 네 가지 모험(1987)>은 시골소녀 레네트와 도시소녀 미라벨이 만나 겪는 소소한 사건들을 따라간다. 영화는 총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장 파란시간이 자연의 경이를 다룬다. 로메르 영화의 여자들은 참 쉽게 친해진다. 레네트와 미라벨도 그렇다. 여름휴가를 온 미라벨은 길에서 만난 레네트와 친해져 그의 집에서 묵게 된다. 저녁을 먹으며 레네트는 파란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란 시간이라고 들어봤어? 동이 트기 직전 1분간의 정적이 찾아와. 낮새들이 깨어나기 전, 밤새들이 잠든 후 그때 고요가 찾아와.” 둘은 새벽에 일어나 파란시간을 같이 보기로 한다.

그런데 레네트와 미라벨이 새벽에 밖으로 나가 파란시간, 침묵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하필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경운기 소리가 사라졌을 때는 파란시간은 이미 지나간 후다. 레네트는 화가 나고 속상해서 울부짖는다. “너한테 파란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 미라벨이 하룻밤 더 묵으며 파란시간을 보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레테트는 울음을 멈춘다. 파란시간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레네트의 마음은 그토록 간절한 것이다. 레네트의 마음은 곧 에릭 로메르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미라벨처럼 자신이 보고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바람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음 날 새벽 레네트와 미라벨이 파란시간을 경험하고 서로 부둥켜안을 때 나도 그들만큼이나 가슴 뭉클했다.

파란 시간이라고 들어봤어?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파란시간을 진짜로 경험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여러 번 일출을 봤고 고요한 곳에서 맞았던 몇 번의 일출에선 파란시간을 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파란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연현상을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매개를 통해서만 자연현상을 경험한다. 말이 그 매개다. 파란시간을 경험할 때 미라벨은 자연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레네트에 의해 파란시간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야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파란시간처럼 특별한 자연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것에 대한 기대와 흥분 속에서 그것을 향해 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마주하게 되는 서사는 실은 매우 낯익다. 자연의 경이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하나 같이 이와 같은 서사를 따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포물이다. 공포물은 특정 장소나 시간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정이 되면 공동묘지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라는 식으로 누군가의 입을 통해 특정 장소에 얽힌 무시무시한 사연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 장소와 시간은 특정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전에 없던 아우라를 띄게 된다. 이제 인물들은 더 이상 그곳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공포에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는 공동묘지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얽힌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객들을 파란시간으로 이끄는 건 레네트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은 관객들은 기대와 흥분 속에서 파란시간을 향해 가다가 그것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그것을 이번에는 주목해서 알아보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감정적 고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로메르는 자연에서 경험한 감동을 재현하기 위해 전형적인 서사 공식을 따른다. 만약 그가 그러한 서사공식을 따르는데 그쳤다면 우리가 느낀 감동은 흔해빠진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시간, 그 침묵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쉿!


<레네트>는 로메르의 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녹색광선(1986)>과 연작이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들이 여름휴가지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자연현상 자체를 서사의 중심에 두는 건 이 두 편이 유일하다. 녹색광선은 일몰 이후에 수평선 위로 나타나는 가느다란 녹색광선을 뜻한다. <레네트..>는 일출을, <녹색광선>은 일몰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밤과 낮의 자리가 뒤바뀌는 일출과 일몰은 하루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 영화에서 수도 없이 다루어져왔다. 많이 다루어지면 그만큼 다양한 표현이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표현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다들 앞선 표현을 따라하는 것일 텐데, 영화만 영화를 따라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영화를 따라하다 보니 영화 안팎이 다 일출과 일몰의 클리세로 두껍게 뒤덮여, 클리세를 벗어나 그것들을 경험하는 게 불가능해진 형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로메르는 일출과 일몰을 다루면서도 클리세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일출과 일몰의 압도적 순간, 노을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해가 뜨고 지는 순간을 다루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서둘러 가느라 스쳐 지나가버린 시간, 본격적인 쇼가 시작되기 직전 또는 직후의 시간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흔히 다루어지는 일출의 시간과 파란시간은 다르다. 전자가 거대한 스펙터클이라면 후자는 잠깐의 침묵이다. 둘은 서로 다른 만큼 그것을 경험하는 이에게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전자는 놓칠래야 놓치기 힘든 화려한 볼거리인 까닭에 전자를 경험하는 데는 별다른 주의집중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우리는 전자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그것들을 접할 때 굳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파란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숨죽여 집중해야 한다. 아주 작은 소음으로도 그 순간을 망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온 감각을 곤두세워 침묵에 귀 기울이는데 그것은 화려한 스펙터클에 자신을 내맡기는 수동적 체험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다.

이른 새벽 레네트와 미라벨이 숨 죽여 귀 기울이는 동안 나도 그들과 함께 숨죽여 귀 기울였다. 아직은 밤의 시간, 두꺼비와 개구리 올빼미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것들이 노래를 멈추자 과연 자연이 숨을 멈춘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침묵에 귀 기울이는 동안 나는 밤 동물들과 아침 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들짐승들의 노래에 의해 밤이 닫히고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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