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

플로리다 프로젝트-션 베이커

by 김지현

몇 년 전 미국에 사는 친구 집엘 방문했다. 친구에겐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이 있었는데, 육아 방식이 특이했다. 친구는 딸이 어딜 가든 데려가고 데려왔으며 어른이 없는 곳에 딸을 혼자 두는 법이라곤 없었다. 아침마다 스쿨버스가 집 앞에 섰는데, 그 짧은 거리도 딸 혼자 가도록 두지 않고 따라나섰으며, 학교에서 집까지 일반버스가 다녔지만 하교할 땐 반드시 자기 차로 데려왔다. 피아노학원은 물론이고 딸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데려가고 데려왔고 스케이트를 타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언제나 친구가 따라갔다. 친구 딸은 그 나이까지 한 번도 혼자서 또는 또래끼리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친구 딸만 그런 게 아니었다. 거리에 혼자 다니는 아이라곤 없었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는 아이를 집안이나 차에 혼자 두거나 길에 혼자 다니게 하는 게 불법이라고 했다.

미국에 두 달 머무는 동안 아이들끼리만 걸어 다니는 걸 딱 한 번 보았다. 어느 저녁 길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흑인과 히스패닉계 소년 서넛이 걸어오고 있었다. 미국 생활 두 달 만에 나도 아이들끼리만 다니는 모습이 낯설어져서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게 됐다.

미국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는 또래끼리 어울려 다니며 노는 아이들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부모들이 아이들끼리 싸돌아다니도록 놔두는 것일까? 짐작대로 아이들의 부모는 제대로 된 방 한 칸 구할 능력이 없어 싸구려 모텔에 사는 루저들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무능과 무책임 덕분에 부모의 보호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 아이들은 쉴 새 없이 거리를 쏘다닌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내게 적지 않은 해방감과 동시에 근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고작 아이들끼리 쏘다니는 걸 보고 해방감이니 근심에 사로잡힌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이들끼리 쏘다니는 게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곳에서는 그런 감정에 빠질 일이 없다. 그 감정은 아이는 어른과 같이 다녀야 한다는 규범을 전제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그것은 아이가 혼자 나다니는 행위를 규범 밖의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생겨나는 감정인 것이다.

예전에는 개들이 길거리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컸고,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개들은 주인 동반하에 줄에 묶인 채로만 나다닐 수 있게 됐고,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가끔 길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개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 개들은 짧은 줄에 묶인 개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날렵한 동작으로 저 가고 싶은 대로 돌아다닌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개가 되어 돌아다니는 듯 자유의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그 개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근심에 빠져든다. 기쁨이 잠깐이라면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진다. 보호자 없이 다니다가는 차에 치기 십상이고 집을 잃을 수도 있다. 길에서 아무 거나 주워 먹다가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기생충에 감염되거나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는 나쁜 사람에게 잡혀가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고, 개장수에게 잡혀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보호소에 끌려가는 경우에도 그보다 나을 게 없는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요즘 안전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상급 기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부의 축적으로 인류는 과거에는 어쩔 수 없는 일로만 받아들였던 위험요소들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위험을 하나 둘 피할 수 있게 되자 그만 위험에 대한 면역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위험에 대한 과도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됐다. 이제 안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최우선의 당위요, 도덕이 되었다. 영화에서 어른들의 보호를 벗어나 아이들끼리 쏘다니는 걸 보다 보면 어느새 해방감은 온데 간데 없고 아이들에 대한 근심이 마음을 꽉 채운다.

엔딩에서 아이들은 디즈니랜드로 달려간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입장이 허락되지 않던 곳. 디즈니랜드로의 초대는 감독이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근심에 찬 어른의 선물. 온갖 놀이기구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인디아나 존스가 되어 모험하고, 기구를 타고 360도 회전하고, 거꾸로 처박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선 어떤 위험도 실제적인 위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위험요소가 철저하게 통제되는 까닭이다. 이제 그곳에서 아이들은 안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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