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알모도바르
어린아이들은 똥이 더럽다거나 성이 부끄럽다는 걸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것들에 대한 감정과 태도를 엄마의 반응을 보면서 배운다. 엄마가 똥냄새를 맡으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면서 똥에 대한 불쾌감을 배우고, 자신이 팬티에 손을 넣었을 때 엄마의 당황한 표정에서 성에 대한 수치심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과 태도는 사물 그 자체와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타인의 감정을 모방하면서 배운다.
최초의 학습이 우리 무의식에 뿌리내린 채 우리를 깊숙하게 지배하기는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최초의 학습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엄마의 감정을 모방하던 그 능력으로 또 다른 타인들의 감정을 모방하면서 사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배신해나간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배신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났다. 우리 옆집에 같은 반 친구가 살았다. 친구네 부모님은 부부싸움이 잦았다. 밤늦도록 거친 욕설과 고함소리가 이어지는 날이 많았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대문 앞에 깨진 가재도구가 수북이 쌓여 있곤 했다. 어느 날 등굣길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의 외도와 그로인한 불화를 말했다. 나는 친구의 태도에 놀랐다.
그때까지 나는 부모가 부부 싸움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밖에 나가 이야기하지 않거나, 이야기하더라도 슬프고 어두운 어조로 해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엄마의 행동을 보면서 배운 것이다. 엄마는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우리 형제들 앞에선 구슬프게 신세한탄을 늘어놓았고, 남들 앞에서는 그 일을 쉬쉬했다. 나는 엄마의 신세한탄을 들을 땐 같이 울었고, 엄마가 쉬쉬할 땐 덩달아 조마조마했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본 모든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부모가 불화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의 싸움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겨 우울을 길게 드리우고 다녔고, 남들 앞에서는 부모의 치부이자 자신의 치부인 가정사에 입을 닫았다.
그런데 친구는 부모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얘는 날라리일까? 나는 친구의 불경한 태도에 슬쩍 겁이 났다. 그때까지 내게 부모는 절대적 존재였다. 부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었고, 부모가 곧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는 부모의 싸움에 대해 불구경하듯 이야기하면서 부모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처음엔 그 거리에 적응이 안 돼 어지럽고 불안했다. 그러나 금세 새로운 뷰가 열리더니 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다. 부모 싸움에 내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부모의 싸움이라는 게 맨날 반복되는 일상사일 뿐 대수로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걸 대단한 비밀이나 되는 양 감추어온 지난날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다음 날 등굣길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친구의 말투를 흉내 내 엄마 아빠가 싸운 얘길 했다.
그 후로도 때때로 사물에 대한 낯선 태도와 마주치곤 했다. 낯선 태도는 예외 없이 낯선 세계로 통해있었다. 그 세계들에선 무거운 것이 가벼워지고, 추한 것이 아름다워지고, 분명한 것이 모호해지고, 단순한 것이 복잡해지고, 따로 떨어진 것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사물들이 거꾸로 뒤집힌 그 세계에 들어설 때면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경험했던 그 해방감. 그러나 막상 그 세계와 마주치면 선뜻 그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그 세계에 대해 호기심 이상으로 두려움이 큰 탓이다.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앞에서도 나는 한참이나 멈칫거렸다. 알모도바르가 만든 그 세계에선 추악한 자가 순교자처럼 고귀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추악한 행위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했다. 나는 이 세계의 비도덕성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이 매료되었다. 이 세계에선 추악한 자와 그 자가 하는 소위 사랑이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자와 저런 자의 행위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릴 수가 있을까?
<그녀에게>는 러브스토리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러브스토리.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먼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남자의 이름은 베니그노. 베니그노는 자기 집 창문 너머로 건너편 발레 학원에서 춤추는 알리샤를 바라보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면서 접근할 기회를 엿보는데, 알리샤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면서 그녀의 곁에 있게 된다. 간호사이던 그가 그녀를 돌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talk to her>이다. 베니그노는 누워있는 알리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모두가 그녀를 산송장으로 여기지만 그는 그녀가 살아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의심치 않는다.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일부러 그녀가 좋아하는 무용이나 무성영화를 보고 와서 이야기해주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준다. 둘의 대화는 언어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베니그노의 간호는 그녀의 몸이 하는 이런저런 말들에 섬세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씻기고 몸을 뒤집고 옷 입히고 마사지하고 일광욕시키면서 그녀와 내밀하고 다정하게 소통한다. 그가 마음을 다해 보살핀 덕분일 것이다. 어느 날 알리샤가 눈을 뜬다.
알리샤가 잠들어 있는 병원 이름은 <숲속의 병원>이다. 물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화 속에선 공주가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지자 이웃나라 왕자가 공주를 구하러 온다. 왕자가 입을 맞추자 공주가 깨어난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왕자가 의식이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특별한 성적취향을 가졌다면, 흔한 말로 변태라면 말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일 수 있을까?
알리샤가 눈을 떴을 때 베니그노는 감옥에 갇혀있다. 알리샤를 강간해 임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 사랑을 나눈 것이라고 한다. 그 일은 베니그노가 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를 보고 난 후에 일어난다. 영화는 몸이 점점 줄어드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남자는 몸이 너무 작아져 사랑하는 여자와 일반적인 방식으로 섹스를 할 수 없게 되자 여자의 질 속으로 들어간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 것이다. 영화 속 남자에게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베니그노는 알리샤와 사랑을 나눈다. 왕자가 입을 맞추자 공주가 깨어났듯,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알리샤가 눈을 뜬다.
베니그노는 변태고 범죄자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다보면 자꾸만 그에게 설득되면서 나의 판단에 자신을 잃게 된다. 그의 행위는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일방적인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파렴치한 악당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악이니 정상/비정상의 구분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을 나누는 경계는 땅에 금을 긋듯 임의적으로 그어진 것에 불과하다. 과거엔 선이던 것이 지금은 악이고 이 사회에선 선인 것이 저 사회에선 악이 된다. 그러나 일단 경계가 그어지면 그것은 국경선만큼이나 확고한 실체가 되어 좀처럼 넘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알모도바르는 그 경계를 레고블록 허물 듯 허물어 전혀 다른 질서를 만든다. 선/악, 정상/비정상의 위치가 거꾸로 뒤집힌 이 세계에서 베니그노는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다.
사랑을 이루는 길은 험난하게 마련이다. 동화 속 왕자가 공주에게 가는 길을 가시덤불과 불 뿜는 용이 막았다면, 베니그노가 알리샤에게 가는 길을 막는 건 사회적 시선이다. 베니그노의 사랑은 끊임없이 부정된다. 그의 사랑은 비정상이고, 그가 그처럼 비정상적 관계에 집착하는 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당신의 사춘기 경험이 이상하군요.” 정신과 의사가 말한다. 베니그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혼자 아픈 어머니를 돌봤다. 의사는 그런 베니그노의 어린 시절을 이상하다고 한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정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편모나 편부가 아닌 양쪽 부모가 같이 아이를 돌보는 게 정상적인 가정이다. 이와 같은 기준이 세워지면 그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모든 조건은 비정상이요, 비정상이기에 불행한 것으로 기정사실화된다. 그러나 베니그노는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이 불행하지 않았다. 알리샤와 함께한 4년의 시간이 그랬듯이 말이다. 또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건 그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상하게 보는 의사에게 대꾸한다. “이상할 거 없는데요.”
의사는 베니그노가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인해 성적욕망이 왜곡됐고, 그로인해 고통 받고 있다고 털어놓길 기대했을 것이다. “여기 왜 왔죠? 문제가 뭐에요?” 그러나 베니그노는 알리샤를 만나기 위해 상담신청을 한 것뿐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하는 정신과 병원을 지나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한다. “그런 거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의 욕망을 정상이 아니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털끝만큼도 갈등이 없는데, 그의 태도는 특별한 것이다.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는 보통의 욕망과는 달리 그의 욕망은 질병이고 범죄인 까닭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욕망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해야 마땅하다. 자신의 욕망을 쫓기보다는 그것을 부정하는 데 힘쓰면서, 죄인답게 죄의식에 짓눌려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죄 많은 욕망에 대해 당당하다. 그의 당당함은 평범한 청춘남녀의 무구한 당당함과는 또 다르다. 거기에는 거의 공기처럼 퍼져있는 혐오에 맞서 자기 긍정에 이른 자의 위엄이 깃들어 있다.
알리샤의 임신사실이 드러나자 병원에서 회의가 열린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동료들은 베니그노를 지목한다. 베니그노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그들과 싸우지 않지만 굴복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심판 앞에서 후회도 변명도 없이 그저 자기 행동의 대가를 받아들이는 베니그노의 표정은 순교자의 그것만큼이나 고귀하다.
알모도바르는 베니그노를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그의 금지된 욕망과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용기를 응원한다. 아름다움은 그의 존재와 욕망에 대한 최상의 긍정의 표현인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담겨있다. 욕망을 억압할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욕망은 포기를 모른다. 어떻게든 자신을 실현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베니그노의 욕망도 예외가 아니다. 감옥에 가두는 처벌 같은 건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알리샤를 보지 못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뿐이다. 그는 자살한다. 그녀에게 가기 위해 감옥을 탈출한 것이다.
‘어느 날 슬픈 표정의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의 빈 집을 찾아와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기다린 그 아픈 영혼이라네.’
영화에 흐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의 노랫말처럼 감옥을 탈출한 그의 영혼은 다른 이의 몸에 깃든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또 한 명의 남자 마르코에게.
마르코는 베니그노의 유일한 친구이자, 그의 사랑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둘은 정신적으로 깊이 교감한다. 마르코가 감옥으로 베니그노를 면회 갔을 때 카메라는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이제 둘은 둘이면서 하나다. 그는 베니그노의 집에 살게 된다. 베니그노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베니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창문 너머로 건너편 건물의 발레학원을 바라본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한 알리샤를 발견한다. 얼마 후 마르코와 알리샤가 마주친다. 알리샤는 마르코에게서 기억나진 않지만 잘 아는 것 같은 누군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첫눈에 마르코와 사랑에 빠진다. 멀고 험한 길을 돌아 마침내 베니그노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