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영공x리라영 Dec 02. 2023

조기 유학 영어 시험에서 탈락했다.

조기유학 이야기 #1

 혓바닥 수술을 하면 영어 발음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수술했다는 학생과 그 어머님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니 공용어를 영어로 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절이었나.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이전에, 조기 유학 열풍이 심하게 불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에 1달러를 800원에 사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는 시골 변두리 아주 작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너도나도 '시골'이라는 단어를 잘 쓰니까 내가 얼마나 시골에서 나왔는지 전달하기 위해 난 '깡촌'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셨고, 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서 경기도 외각 '깡촌'에서 자랐다. 생후 24개월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7살이 됐을 때는 처음 나간 시대회에서 장원을 급제했다. 글쓰기 연습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대회 나가기 전에 집 옆에 있는 저수지에서 삼 일간 물을 쳐다보면서 고민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주제가 '물'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하루에 한 권 책을 읽었던 거 같다. 책을 안 읽은 적이 없었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야 했다. 백일장마다 나가 상을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옆에 있는 한 학년에 두 반만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그다음에는 건물이 없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진짜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고민하는데, '남녀공학 공립학교' 진학을 할 학교가 없었다. 정말이었다. 기독교 재단의 사립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남녀공학 공립학교'가 새로 지어지는데, 내가 입학할 때까지 건물이 다 지어져야 하는데 안 지어져서 옆에 있는 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했다. 그 초등학교도 지어진지 얼마 안돼서 4학년까지만 학생들이 있던 거 같다. 


 이런 경험들이 난 '깡촌'이라서 생겼다고 생각하고, 항상 거기서 지내기 싫어했다. 내가 겪는 이런 어려움과 불편함이 서울에 가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티를 한 번도 낸 적은 없었지만, 항상 깡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그렇게나 많이 읽었기에 내 세계는 책 안에 있었다. 책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옛날에도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 '세계 명작 50선' 이런 것을 읽으면서 외국 문화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내 세계에서는 '미국 유학'이 당연한 일이었다. 살면서 언젠가 한 번쯤 미국에서 사는 게 내 할 일이라고 머릿속에 박히게 된 것이다. 가족 여행으로 외국을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막연히 '미국에 언젠가 가서 좀 살겠지.'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걸 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전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있었다는 게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생일이 빠르니까 아직 16살이었다. 엄마가 '엄마 친구 아들이 서울 가서 미국 교환학생 가기 위해 시험을 보는데 따라가서 너도 한 번 봐봐.'라고 하셨다. 뭔지는 몰랐지만, 따라가서 봤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냥 엄마가 뭘 하라고 하면 토 달지 않고 그대로 했다. 그냥 해야 되는 건 줄 알았다. 단 한 번도 안 한다고도 못 한다고도 한 적도 없다. 시험 결과는 예상대로 약간의 점수 미달로 탈락이었다. 왜 예상대로냐면 난 시험에 약했다. 이걸 딱히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자주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수업 태도, 발표, 이런 것 들에 비해 시험 점수가 낮았다.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항상 그랬다. 나중에 대학 가서 발표하면서 깨달은 건데 나는 발표, 프로젝트형 인간이다. 종이 시험지에만 약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계속 탈락했다. 67점 만점에 46점이 커트라인인데 내 점수는 43 점정 도였던 거 같다. 커트라인은 44점인가 46점인가 그랬다. 같은 시험을 두 번을 더 봤는데도 다 비슷한 점수였다. 오히려 세 번째 점수가 가장 낮았던 거 같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다른 회사는 41~42점이 커트라인인데도 많았다. 조기 유학 열풍이 불던 시절 '영어 조기 유학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고 차린 회사들이 많았는데 시험도 커트라인도 다 제각각이었다. 다른 회사도 좀 알아볼걸. 회사는 내가 시험을 3번이나 보고도 통과를 못하자, 그때 슬며시 이 점수로 미국 갈 수 있다고 했고, 대신에 좀 일찍 미국에 가서 뉴욕에서 학원을 다니는 게 어떠냐고 했다. '다 돈 쓰게 만들려는 개수작이지.'라고 생각하고 엄마한테 절대 뉴욕 안 간다고 나는 바로 미국 공립학교를 다니겠다고 했다. 아무도 내게 특별하다고 말해준 적 없지만, 난 내가 발음이 한국인 치고 좀 좋은 것, 리스닝 능력이 특출 난 것, 독해 능력이 우수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 믿었다. 회사에서는 지금 신청하면 내년에 미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기다리는데, 그다음 해가 되니까 교환학생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너 티발 씨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