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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by La Verna

중용

사람들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익숙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연인이나 가족 관계에서 더 자주 마주한다.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도 비슷하다. 작은 서운함이 처음엔 미세한 틈에 불과하지만, 그 틈이 점점 커지면 벽이 된다. 그리고 그 벽은 투명하다. 보이지 않으니, 서로는 계속 부딪히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감정의 균열은 깊어지고, 어느새 나와 상대를 가로막는 허들이 세워진다.이건 가족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부부나 부모자녀, 형제자매 관계에서 무심코 오가던 언행 속에 기대와 실망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허들을 세우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서운함으로 변하고, 서운함은 고집이 되어 관계 사이에 벽을 세운다. "이 정도는 당연히"라는 기대는 고마워할 줄 아는 능력도 잃게 만들고, 자신을 그 벽 뒤로 밀어넣어 상대를 이해할 가능성조차 없애버린다. 문제는 이 허들을 넘으려는 노력이 점점 줄어든다는 데 있다. 마음을 쓰는 일이 부담으로 느껴지고, 말그대로 좋은관계를 유지하려는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에, 바쁜 현실을 핑계삼아 이 관계를 방치한다. 그래서 허들이 생기면 넘기보다 그냥 돌아서 버리는 선택이 흔해졌다. 하지만, 이 허들은 방치한다고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아져, 나중에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것 같다.허들을 넘기 위해선 중용의 길을 가야한다. 극단을 피하고, 지나친 기대나 서운함도 경계하고,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렇게 허들을 넘고가야 앞으로 갈 수 있다. 허들을 넘는 첫걸음은 내 안의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문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앞서, 내가 만든 감정의 벽을 직면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 감정을 잠시 내려두고, 내가 만든 벽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그리고 상대 또한 나와 같이 결핍과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벽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나의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허들을 낮추게 된다. 상대가 완고하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내 고집이 만들어낸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중용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되, 필요한 순간 내편에서 먼저 손을 내밀게 한다. 먼저 양보의 신호를 보내는 일이 불편할 수 있지만, 이 손짓은 패배가 아니다. 나 자신을 감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이다.가족과 같은 내밀한 관계에서는 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얽히고설킨 여러 좋고 나쁜 감정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이 결단은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해방, 내 마음의 고통을 덜어내는 선택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미움이라는 감정을 붙들고 있는 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이다. 감정의 벽을 넘는 노력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케어하기 위한 것, 균형을 되찾기 위한 일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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