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20몇년을 그야말로 신화적 수준으로 착하게 살았다. 정확히 기억나는 게 스물한 살 땐 "넌 무슨 365일내내 임산부가 태교 중인거마냥 자신을 돌보며 착하게 사는거같다"는 말을 들었다.이 말 들으면 다들 ‘그래, 너도 힘들었겠다’ 고 말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착한, 성인(聖人) 중의 성인. 내 별명이 실제로 '성모마리아'였다. 내입으로 말하기 남사스럽지만 주변으로부터 그리 불려졌고, 연년생 언니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거의 신급으로 학교에서 조차 '유느님'으로 불렸다. 언니 이름의 중간 글자가 '유'자라서 그렇게 불렸는데, 언니와 내가 같이 다니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두고 "얘들은 존재 자체가 걸어 다니는 성화(聖畫)"라고 하면서 손을 잡거나, 어디선가 우리가 서있으면 여기가 '순례지가 됐다'는 어른들의 개소리가 돌기도 했다.―농담 같지만, 아주 불행히도 실화다.
근처 편의점 사장님이 아는 분이셨는데, 우리가 들어가서 충전기 하나 사겠다고 진열대 앞을 얼씬거리자, 앞에 있던 '매운맛 콘돔'을 아주머니가 양손으로 가리셨다. 우리가 무슨 인류의 순결을 대표하는 수녀라도 된 줄 아셨나 보다.
그렇게 착한 아이로 살아가는 건 처음엔 아름다운 일 같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누군가에겐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착각을 주고 민폐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내 뒷통수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내 과도한 배려와 인내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나에대해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머리 위에 네온사인 같은 글씨가 번쩍였으며,
"축하합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완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변질되어갔다. 이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까칠하고, 세상에서 제일 타락했으며, 가장 악랄하고, 동시에 가장 쓰뤠기로 존재로 거듭났으며, 처음엔 이 변화가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점점 '이게 바로 나였구나!' 하는 희열과 함께 자기 합리화가 슬며시 생기더니, 이제는 말 한마디도 경고 딱 3번 주고 안 통하면 바로 상대 심장을 푹 찌르는 수준으로 진화해버렸다.
착한인간 콤플렉스 속에 살땐 잘 몰랐다. 어헛!? 내가 그렇게 참아주니까 상대들이 점점 날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인간계의 마더 테레사급 쓰레기통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는 거의 "너의 인성으로 기네스북 한번 올라가보자" 하는 수준까지 치솟았기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사는 건 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로 생각할 때 도저히 합리적인 전략이 아니라는 걸 땅을 치며 처절히 깨닫게 되었다.―그래서 난 각 잡고 망가지기로 결심했었다. 그렇게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랄해졌으며, 막말을 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덕에 주변은 깔끔하게 내게 아무 기대를 하지 않으며, 나 역시 쓸데없이 '착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감정소모없이 완벽한 균형감을 갖추고 살게 되었다는 게 이 얘기의 최대 핵심이다. 물론 여기서 불쑥불쑥 내 속에 남아있던 어린시절의 '착한척하던 아이'가 조용히 독백을 던진다.
"너 정말 그래도 되겠어? 그럼 너 진짜 쓰레기 되는거야..." 그런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한다,
"괜찮아, 어차피 타락했으며, 악역의 마이웨이를 걷고있고, 인간이 너무 착하면 노잼이야."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각 잡고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난 나름의 정체성을 찾은 것 같다.
가끔은 자꾸 경계를 넘는 이들에게 '팩트살인'을 날리는데, 막상 해보니 속이 후련하고, 천국이다. 나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니 착한척할 필요도 없고, 미움받을 용기를 실현한듯한 희열과 함께 인간관계에서 드디어 내가 건강해졌다는 느낌이든다. ‘착한 척’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마조히즘에서 탈출했더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는 줄었지만, 놀랍게도, 나를 좋아하는 '내 자아'의 비중은 무한대로 늘어났다.
어쩌면 세상은 모두가 약간은 타락한 척, 악역을 해야만 제대로 살아가고, 자기의 삶을 지킬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래다가도, “어디가 끝일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병맛'으로 쭉 가려나” 하고 씁쓸해하다가도 곧 깨닫는다. 내가 나의 바운더리를 지킬 수 있고, 상대를 '진짜' 오래도록 존중할 수 있다는 걸.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젠 말도 안 되는 성모마리아 소리 듣기는 버렸으며, 꼴사납게 착한척하던 나를 버리고 적당히 일부러 이기적이고 망가지니, 세상 앞에 난 오히려 겸손해졌고, 나는 드디어 '나'다웠다.
삶의 밸런스!
그것은 ‘착함’과 ‘악역’ 사이, 절묘한 밀당 속에 존재한다.
ㅡThread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