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퇴실 예정’인 몸이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모두가,
생명이라는 이름의 집에 잠시 머무는 임차인이다.
몸이라는 작은 거처에 잠시 들러 살면서도,
몸이라는 방에 정을 붙이고, 또 낯선 미래를 위해
기어코 벽지를 바꾸고 커튼을 새로 단다.
"불멸할 것처럼 살아보자!"
정주(定住)의 미련을 부린다.
세입자이나 자꾸 인테리어에 진심을 담는다.
삶은 사실 임시거처와 같다.
짧은 머무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만 그 공간을 붙잡고 꾸미고, 붙들려 한다.
그런데 '임시'라는 감각을 받아들이면,
욕심은 잠잠해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완벽을 좇는 마음은, 자주 탐욕의 형태로 부풀어 오른다.
그 부푼 마음은 점점 넘치기 시작하면서 과잉을 부르고, 자신을 슬며시 일그러뜨린다.
완벽을 향한 마음은 어느새 과한 기대로, 기대는 천천히 탐욕이 된다.
탐욕이 흐를 땐 곱지 않고, 무를수록 아름다움은 없다. 탐욕에 지친 삶은 빛을 잃기때문이다.
욕망에 넘치다 못해 질식해 없어져버리는 셈이다.
어찌보면,
한국은 욕심을 적게 내는 사람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조금 덜 가져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실은, 그게 훨씬 자유로운 방향이다.
적당한 포기와 적당한 내려놓음을 배운 사람들에겐 안전하고 무난한 삶터이자, 괜찮은 나라다.
무던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ㅡ 큰 위험도, 큰 충돌도 없다.
하지만 '조금 더'를 향해 조급하게 손을 뻗어 더 가지려는 순간, ㅡ 헬게이트의 문을 연다.
그렇게 지하의 문은 입을 벌려 열리고, 그곳은 이내 사람을 끌어당기는 늪이 된다.
그 아래에는, 비교와 조바심이 가득하다.
서로를 밀쳐내며 올라가려는 경쟁의 구조가 보인다.
업신여김과 저울질, 불안과 분노, 보여주기식 경쟁이 들끓고 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지워진다.
‘누구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사람들을 소리 없이 갉아먹는 독처럼 퍼진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공허가 병처럼 번지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각자의 고립된 전쟁을 치른다.
어쩌면 이곳은, 헬게이트에 떨어진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새디즘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으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삶.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외친다.
'있어빌리티' '있어리즘'
“더 가져야 되고, 더 있어보여야 돼!”
어느 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험지같다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정답'을 향해 목을 매는 수험생처럼이 달려가는데,
처음부터 정답이 틀렸다면?
문제 자체가 잘못 출제되었는데도, 다들 그 문제 안에서 정답을 찾으려 애쓴다.
사람들이 단체로 착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때도 있다.
집단적으로 ‘정답놀이’에 몰입한 채, 틀린 게임판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스스로 짐을 만든다. 아무도 들라 하지 않았다.
‘걱정’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내가 들고 있는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생긴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남들 다 드는 줄 알고 나도 들었던 그 짐을 —사실은 아무도 들고 있지 않았고, 나 혼자서만 헛되이 허우적거리고 꽉 붙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그 짐을 열어보면,
그 안엔 자랑스럽기까지 한 ‘욕심’이 떡하니 앉아 있다.
욕심을 포기하면, 의외로 시야가 선명해지고, 마음은 홀가분해진다.
욕심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잃는 것은 없다.
욕심을 내려놓는다 건,
사실 무언가를 버리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가볍고, 더 자유로운 길을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결국에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방향이다.
‘헬게이트와 무거운 삶을 거부하는 것’-이고,
조금 더 나로 사는 용기.
가볍고 명료한 길로 스스로를 이끄는 일이다.
조금은, 자신에게 집중해도 괜찮은 것 같다.
나대로 숨 쉬다 보면, 삶이 의외로 예측하지 않은 곳에서 정돈되기 시작한다.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나다울 수 있다.
마음의 무게와 에너지를 내 식견에 실어 나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해야 할 일들은 줄지 않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훨씬 분명해진다.
남에게 좋아 보이기 위한 일, 있어보이기 위한 세련된 옷, 남에게 조금은 더 고귀해 보이기 위한 일들을 하나씩 지워보면, 나에게 필요한 것만 단정하게 남는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돈도 남는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돈 때문에' 걱정한다고 한다. 나도 제외할 수는 없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판단으로는, 그중 60-70%는 남들의 '시선' 때문이다. 그리고 한 30%정도는 '비교'에 못이겨서이고, 나머지 10%정도는 알 수 없는 불안감 정도가 아닐까싶다.
아무도 시키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인생이라는 리그전에 뛰어들어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달리고 있는 셈이다.
욕심이라는 짐을 한 줌 내려놓으면,
당장 해야 할 일들만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고, 복잡하고 산만했던 마음도 차츰 정돈되기 시작한다.
훨씬 수월해진다. 어쩌면, 바쁘고 복잡해서 버거운 줄 알았던 삶은, 사실 단순하지 않아서 힘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7살 어린 아이처럼 스스로를 바라보면 좋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그렇게 서운하고 어떤 감정이 그리 캥기는지, 어떤게 부족해서 마음이 불편한지.
단순한 물음 속에서 힌트를 찾게 된다.
욕구불만은 그저 짜증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보내는 ‘도와달라’는 신호다.
지금 나를 좀 더 들여다봐달라는 작은 외침.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매달리는 마음은, 혼돈과 불안을 낳는다.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이상해진다. 하지만 단호하게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의외로 풀리지 않던 다른 문제들이 매듭이 풀리듯 자연스럽게 풀려나갈 때가 있다.
결혼과 출산율 저하 문제 역시, 따지고 보면 ‘남의 눈’이라는 감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싶다.
“남들은 이 정도는 하니까, 나도 이정도는 해야지.”
“아니, 그보다는 조금만 더. 아니, 더-, 더! 더!!”
— 이런 끝없는 비교, 체면, 강박.
이 '생각 많음'이 쓰나미라면 삶 전체가 집어 삼켜진다.
세상은, 꿋꿋하게 이 굴레를 깨려는 사람을 싫어한다.
사람을 틀에 끼워 맞추고,
그 틀 안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며 시스템은 그들을 응시하며, 미소짓고 웃고 있다.
자본주의의 방식이 원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더 벌게 만들고, 더 쓰게 만들고, 그러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 다음, 다시 팔아먹는 순환 구조.
하지만 그럼에도 단호하게, 그 굴레를 깨뜨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대한 자기의 가치관을 부여하고 자기답게 피어날 수 있다.
수영을 할 때 깊은 물에 빠졌을 때는,
온몸의 힘을 쫙 빼고, 모든 걸 내려놓으면 몸은 저절로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힘을 빼지 못한다.
사람들이 대체로 돈이 없어서 불안한 것보다,
‘돈 없어 보이는 내가’ 더 두려운 것이다.
남들 앞에 보여질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 초조함은 모든 선택을 흐리게 한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면 어쩌지?”
“남보다 적어도 이만큼 뒤처진 사람처럼 보이면 안되는데..”
“나는 좀 더 있어 보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은 끝없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과소비를,
과소비는 높은 고정비를 만든다.
그 고정비는 결과적으로 나를 바닥에 묶어버린다.
이 슬프고도 피로한 구조의 시작점은,
다름 아닌 ‘남의 시선’이다.
이 악순환은 빈곤의 악순환과 비슷한 형태를 띤다.
사실 ‘빈곤의 악순환’과 다르지 않다.
가난은 통장 잔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가난은 남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거기서부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사람은 어떤 틀을 제시받을 때보다,
존중과 사랑을 받는 경험을 통해 가장 빠르게 변한다고 한다.
틀이나 프레임을 모르고 살면 비교도없다.
사람도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하지만, 틀을 아는 순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고는 흐려지고,
그 틀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해부한다.
그리고 관계는 당연 삐걱이기 시작한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커리어든,
"남들은 이 정도는 하니까, 나도 해야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자기 삶의 문장이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고유의 이야기'다.
가장 치열한 자리는, 언제나 ‘중간’이라는 이름의 자리다.
중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 나서지도 않고 너무 뒤처지지도 않는 그 균형이,
오히려 가장 고된 자리라는 걸 가끔 느낀다.
묵묵히 어중간한 그 중심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가장 어렵고 치열하다.
'중용'이란 이름의 외줄 위에서,
매순간 스스로를 붙잡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흡은 시작된 순간부터 삶이라는 길은 이미 펼쳐졌고,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고 저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동안의 인생을 자꾸만 남의 에세이를 쓰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드디어 내 문장, 내 문체로 쓰는 순간이 된다.
그치만, 세상은 여전히 사람을 자꾸 틀에 끼우고 싶어한다.
MBTI, 혈액형, 퍼스널 컬러,에니어그램...
그 자체로는 무해할지 몰라도,
그 틀에 맞춰 사람을 '완성'하려는 순간부터
사람은 서서히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간다.
욕심을 덜어낸다는 건, 비워내는 일이 아니라,
선택지를 좁히고 더 명료한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더 홀가분하고, 나의 에너지에 집중하며.
조금 더 '나'로 살기 위해선,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하루가, 잔잔하다는 이유로 의미가 없지 않다.
함께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과,
조금 부족해도 그것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
바람 불면 옷깃을 여미고,
비가 오면 함께 우산을 쓰는 하루.
그런 하루들은, 멀리서 찾아야 할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욕심없이 잠잠한 마음안에서 시작되는,
충분히 아름답고
조용하고도 확실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