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
투명성이라는 사치
나는 인간관계에서 투명성이야말로, 특히 친구·연인·가족 사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미덕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세상은 공교롭게도, 숨 쉬듯 거짓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숨 쉬듯'이라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누군가는 호감있는 사람 앞에서 학벌을 공기처럼 부풀리고, 누군가는 집안을 은은한 금박으로 칠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경험과 행동을 고급 포장지로 감싸서 드러낸다.
하지만 사실(Fact)은 늘 끝내 드러나고,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 길어야 삼일장. 나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에게는 더더욱 빨리 드러난다.
거짓은 늘 만료일이 있다. 그날이 오면, 세련된 포장지가 찢어지고 뜯기며 그 안에서 ‘아, 이거였어?’ 싶은 순도 100%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민낯의 추함은, 처음부터 솔직했더라면 얻었을 인간적 매력조차 태워버린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함정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도 나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긴다.
할머니가 "오늘 참 예쁘다"라고 하실 때나, 친구가 "괜찮아, 별일 아니야"라고 위로할 때, 연인이 "당신이 최고야"라고 속삭일 때. 이런 거짓말들은 삭막한 현실의 마찰을 줄여주고 윤칠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함정이 시작된다고 여긴다. 작은 거짓말은 큰 거짓말의 연습이고, ‘선의’는 점점 ‘자기기만’으로 변질된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거짓말이, 어느새 ‘나를 보호한다’는 이기심으로 바뀌어있을 때가 있다. 그렇게 모두 자신만의 거짓말 생태계를 구축하며 근력을 키우듯 거짓말을 성장시키며 살아간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언제부터 진실보다 ‘편안함’, ‘편의’를 위해 거짓말을 택한다. 언제부터 상대의 감정을 다치게 할까봐, 혹은 내 체면이 구겨질까봐, 가장 소중한 것 ‘신뢰’를 담보로 내놓게 되었다.
투명성이라는 사치스러운 용기
그래서 나는 인간관계에서 투명성·진실성·신의를 거의 종교처럼 믿는다. 특히 친구사이, 연인사이, 가족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나의 아킬레스건과 치부를 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생존 전략이다. 부끄럽고 어리석어 보여도, 담담히 "네, 저 원래 좀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게 없습니다”라거나 “부족합니다”,“제 탓입니다”라고 말하거나 드러낼 수 있는 건 겸허한 용기다. 그런 사람은 절벽 끝에서도 '이 사람은 뛰어내려도 살겠다'는 신뢰를 주는 것 같다.
투명성은 사치같다.
투명성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왜냐하면 투명해지려면, 먼저 자신의 민낯을 견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조차 사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지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 역시 그런 진실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을 검증 가능하게, 담담히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을 리스펙하게 되었다. 그 용기는 절벽 앞에서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세 번 숨을 고른 뒤 과감히 몸을 던질 수 있는 힘이다. 그 믿음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단단한 연결이자 다리가 된다.
체면과 위선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지만 '체면'과 '거짓말'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애매했다. 흐릿하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허용해야 할까? 어디까지가 품위이고, 어디부터가 위선일까.
나는 가끔 주변에 "요즘 너무 바빠서요"라고 말한다. 그렇다. 거짓일 때가 많다. 사실 나는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을 뿐인데. 이것이 체면일까, 거짓말일까? 친구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라고 약속을 취소할 때, 실제로는 더 재미있는 일을 위해서였다면? 이것이 배려일까, 기만일까?
이런 애매한 경계가 가끔 헷갈리다. 사실 이 사실은 내가 결혼을 망설이는 주된 요인 중 큰 몫을 차지한다. 미혼은 나 하나로 끝나지만, 가족이 생기면 '잘사는 모습'을 위해 크고 작은 거짓과 허세를 반복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적이나 실력을 들고 "이번엔 감기 때문에"라고 변명하고, 옷이나 가방, 차를 끌고 나와 "선물 받은 거야"라고 둘러대거나, 외부의 품위유지를 위해 ‘겸손을 가장하는’삶을 일상처럼 살아야하는게 싫다.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견딜 수 없이 피곤할 것 같다.
상처받을 권리와 상처 줄 용기
그럼에도 나는 화려한 갑옷보다, 긁힌 무릎을 은근슬쩍 보여줄 수 있는 여유가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결점과 치부를 금고에 봉인하는 순간, 그것은 평생 발목을 잡는 짐이 된다.
금고라기보다, 언젠가 반드시 열릴 '판도라의 도시락통'. 나는 그 상자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투명성에는 대가가 따른다.
진실을 말하면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또한 상처를 줄 용기도 감수해야 한다.
"네 운전실력은 솔직히 별로야"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의 그런 면이 싫어"라고 고백할 때, "미안하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라고 결별을 통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모든 순간에 필요한 건 잔인할 정도로 정직한 용기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용기를 '냉정함'이나 '무신경함'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나 애덕은 쓰고 아픈 부분이 많다. 늘 꿀처럼 달지 않다. 진짜 우정은 때로는 불편하고, 진짜 관계는 서로의 날카로운 모서리까지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가면없는 용기
나도 사람이다. 가끔은 나 자신을 금박 포장지에 싸고 싶다. 온라인상에 올릴 사진을 열 번도 넘게 보정하고, 애매한 경력을 살짝 부풀리고, 첫 만남에서 가장 매력적인 버전의 나만 보여주고 싶어 화장하고 헤어스타일을 수십 번 고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래, 이 허세로 영웅 대접받을 수 있었으면, 이미 왕관 두 개쯤은 장롱에 쟁여놨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스스로의 결함을 닦아내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 적어도 조금은 초라할지라도 ‘그 사람 누구였지?'라는 말을 본인에게 하지 않게 하려한다.
그래서 나는 성형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 일종의 거짓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감을 얻기 위한 선택이라면 존중하지만. 피부관리에 민감한 나이지만, 사람은 주름과 흉터까지 포함해서 '나'라고 불러야한다고 여긴다. 그것들이야말로 팩트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시간의 증거이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고유한 서명이기 때문이다.
진심이라는 마지막 숨
거짓으로 포장된 세련됨이나 멋짐보다, 민낯으로도 버틸 수 있는 유쾌한 진심이 더 좋다.
그것은 가장 오래가는 매력이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했기에, 더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역시 무의식중에 수많은 작은 거짓말들을 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더 투명해지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라도 해야 충분히 투명성을 갖출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숨쉬듯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된다.
잦은 거짓은 자신의 ‘진심’의 호흡을 거둔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까먹고, 상대방의 진짜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가면을 사랑하는 거라는 외로움에 질식하게 된다.
나는 적어도 그런 질식사는 피하고 살고싶다. 비록 투명성이라는 사치를 감당하기 어려운 날들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마지막 숨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