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어컨 바람보다 차가운 '너 저녁 뭐 먹었어?'

by La Verna

30대의 인간관계는 낭만이 아니다.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다.
관계의 편안함은 서로의 시간과 루틴을 존중하는 데서 온다.

밤 11시.

나는 여전히 묻는다.

“왜 나는 끊지 못하는가.”

언젠가, 나는 끊을 것이다.


-----


“저는 인간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30대중후반을 향해 가면서는 '시간=체력=수면'이라는 성스러운 등식은 피와 땀으로 새겨지며

'깨달음'이 아닌 '체험'적으로 하루하루 세포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이 등식을 깨뜨리는 자 누구인가.

바로—

‘통화를 끊지 않는 자’이다.

30대중반이후 어떤 관계에서 편안하려면, 상대의 시간 감각과 수면 루틴마저 존중받아야 하는 것 같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중반과의 스몰 토크나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통화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최근 통화를 하면 끊지 않는 분으로 인해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 수면루틴이 이리도 인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몰랐다.

밤 11시 구원의 바다 같은 침대에 몸을 던지려는 데, 전화벨이 나를 낚아채고 내 평안을 탈취한다.


“제가 오늘 회사에서—”

처음에는 그냥 들었다. 성심껏 경청도 했다.

‘내일 출근’이라는 거대한 숙명과 맞서 싸워야 하는 찰나, 폰을 통해 갑자기 소환된 나는 그저 끄덕끄덕 하면서 처음에는 들어주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밤 11시, 12시, 새벽 1시…

끝없이 어이지는 마라톤 해설 방송.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까지 소환되는 이 무한 러닝타임 속에,

내 피부는 탄력을 잃고, 내 멘탈은 기력을 잃었다.


내가 “오늘 제가 몸이 좀 안좋아서요 일찍 자려고해요”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


“10분만~”


그 '10minute’이라는 이름의 괴수는 새벽 3시까지 나를 짓눌렀고,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10분은 언제나 무한루프가 되어 새벽까지 이어졌고, 나는 이불 속에서 몸부림치며 '왜 이것도 끊어내지 못하는가'라는 자책과 상심 속에, 인간관계라는 늪에서 공허한 푸념을 헤엄치며 호구의 자유형을 이어갔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미(美)적거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목적없는 소통말고, 신비감의 여백을 남기는 관계,.. 그 거리감이 도자기 청자처럼 곱고 단단하면서도 은은하게 관계를 지켜준다고 여긴다.


그런던 결정적인 날, 내 안의 화산이 폭발했다.

"저는 인간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장 없는 대화는 좀먹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발전없는 대화만하는건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요!"

라는 말이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나왔고

........... ...

전화기 너머로 에어컨 바람보다 더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정적은 너무 길어서

내가 ‘여보세요?’를 두 번정도했더니

돌아온 대답—


“근데, 저녁에 뭐 먹었어요?

지금 배민시킬까 고민 중인데.."

30대이후부터는 인간관계에서 특히 이성과의 편안한 관계 맺기란 사실상 어려운 점이 많은것 같다.

30대의 인간관계는 낭만이 아니다. 우정이 아니라,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관계의 편안함은 서로의 시간과 루틴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다.


나는 여전히 묻는다.

나는 왜 통화를 끊지 못하는가.

언젠가, 나는 끊을 것이다.

짧고 압축된 대화 속에서,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것이다.

끊을 수 있는 자유,

진정한 해방.


작가의 이전글가장 고급스러운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