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트레스를 걷기나 러닝으로 푼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어느순간부터 러닝화가 한달에 한켤레씩 닳아없어졌다. 어쩌다보니 남초 회사의 홍일점으로 거듭나게 된 나. 군대 내무반에 잘못 떨어진 민간인 같은 심정으로 회사를 오갔다. 아침에 회사 문을 열면 훅 끼쳐오는 공기는 그야말로 '상남자의 향기'. 담배 냄새, 누적된 피로가 만들어낸 이름 모를 묵직한 공기. 남초사회에서 섬세함은 잘 모르겠다. 모든게 야생이었다. 내가 있는 '남초 중의 남초'.
이곳에서 나는 유일한 여자이자, 소문난 '순둥이'다. 거절 한 번 시원하게 못 하고, 늘 "아.."," 네... 제가 해볼게요","그게좀..."이라고 말을 시작하면, 이 거친 men들 사이에서 금세 화제가 됐다. "~씨는 참 말을 유하게해.","아직 소녀같은 이미지예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칭찬 아닌 칭찬을 들을 때 늘 '소녀는 무슨요.. 투박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입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곳 형님들의 소통 방식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그보다 자기들끼리 기분이 상하면 직접 말을 안 한다. 덩치는 큰데 사람들이 삐치기는 어마어마하게 잘 삐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향한다. 그 소름돋는 시선아래,
> 부장: "~씨, 저기 팀장한테 가서 ~~~고 전해. 다시 해오라고 해."
> 팀장: (옆에서 다 듣고 있음) "~씨, 부장님한테 전해줘요. 뭘 더 바라냐고."
>
두 분 거리 3미터도 안 되어도.. 하루에 수십번은 반복되었다. 나는 직원이아니라 카카오톡이었다. 메신저 처럼 나를 세워두고 탁구 치듯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들뿐만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나를 통해 전달하곤했다. 나는 그 중간에서 "부장님께서 조금 더 보완을 원하시네요..^^;;.", "부장님은 예산 부분이 조금 걱정되시나 봐요..."라며 세상에서 가장 곱디고운 말로 통역을 하느라 진땀을 뺀다.. 거절 못 하는 순둥이의 운명
성격상 "제가 왜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유하게 말하는 게 내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게 회사에선 '소통 수단'으로 통한다. 업무 협조가 안 될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앞세운다.
"~씨가 가서 말하면 다 해줄 거야."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어느새 다른 부서의 까칠한 부장님 앞까지 끌려가 있다. 거절 못 하는 내 성격을 알기에, 사람들은 나를 통해 모든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려 든다. 그래서 달렸다. 출근전 5km, 퇴근후, 5km. 힘들면 걷고 멀쩡하면 뛰었다.
어느날, 폭발해버린 '순둥이!
점심 메뉴 결정부터 업무 전달, 심지어 본인들끼리 투덜대는 뒷담화까지 내 귀에 쏟아붓고는 "~씨가 전달 좀 해줄수 있죠"라며 슥 빠지는 모습에 머릿속 회로가 끊겨버렸다.
투박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유일한 완충지대로 살다 보니, 정작 내 마음엔 피멍이 들고 있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거절 못 하는 내가 그래서 그동안 참 많이도 달렸다.
달리기전 내 멘탈은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었어도, 걷거나 뛰고 나면 다시 활기를 찾았다.
" 툭, 그리고 두두둑"
유독 심한날이 있었다. 오전에는 A씨의 뒷담화를 들어주고, 오후에는 B씨의 짜증 섞인 업무 지시를 통역하느라 영혼이 탈탈 털린 퇴근길. 걸을 힘도 없어서 버스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갑자기 '현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사람인가, 감정쓰레기통인가...'
창밖을 보며 터져나온 감정은 댐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갑자기 눈물이 두 눈에서 우두두둑 떨어져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눈물만 온 게 아니라 더욱 당혹스러웠다. 스트레스로 약해진 나의 비강이 통곡에 반응해 콧물까지 동반했다. 버스 뒷자리에서 소리없이 흐느끼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그곳에 '빌런'이 있었다. 버스 창밖풍경을 응시하며 그렇게 한참을 자아성찰과 콧물 닦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슬쩍 고개를 들었는데, 앞좌석 옆 통로쪽 서 있는 사람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씨...?"
오 맙소사. 신은 정녕 없는 것인가. 회사에서 가장 투박하고 입 험하기로 소문난, 아침까지만 해도 나에게 "전달 좀..."하며 으름장을 놓던 직원이였다.
그는 평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나를 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내상태는 '남초 회사가 낳은 괴물' 이였고,. 콧물이 턱 끝까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수치심에 떨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길, 나는 사직서를 쓸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 ~씨 왔어^_^? "
"커피마셨어요?!"
"저기... 어제 누구누구씨한테 들었어."
어제 버스에서 본 장면이 각색되었다..
"버스에서 오열했다면서요..우리가 잘하게"
"..............."
어제평소라면 "이것 좀 해주세요", "전달해라" 말하던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버스안에서의 직원이 어제 본 나의 '콧물 통곡'의 현장을 부서 전체에 퍼뜨린 모양이었다.
졸지에 나는 말 한마디 잘못 걸면 바로 실신할 것 같은 황송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도 내 눈치가 보이면 "아니, ~씨 듣는데 우리 곱게 말하자"라며 갑자기 표준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거절 못 하던 순둥이 시절엔 나를 우습게 보더니, 콧물 범벅으로 오열하는 광기를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가끔 중재 요청이 들어오긴 한다. 근데 예전처럼 무지성으로 떠넘기진 않는다. 다들 조심스럽게 "괜찮으면"이라는 말을 붙인다.
나는 여전히 "네..."라고 대답하지만, 이제는 선택권이 생겼다.
남초 회사에서 순둥이로 사는 것보다, 콧물 흘리며 우는 미친 사람으로 찍히는 게 더 편하다는 걸 알았다.
착한 것보다 무서운 게 낫다.
그리고 눈물보다 콧물이 강하다.
이게 야생의 법칙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