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생문> (#뒷북)
‘대나무 숲에서 한 명의 사무라이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 이 단 한줄로 요약될 수 있는 사건은 , 네 개의 서로 다른 진실로 나뉜다. 이 상반되는 진실들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실이 무엇인가보다 진실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
✏ 객석에 앉은 순간부터 나는 이미 대나무 숲 속에 있는 나생문 앞으로 와있었다. 무대와 객석까지 비에 젖은 나뭇잎 냄새가 가득했다. 하나의 사건을 각자의 시선에서 다르게 증언하는 알 수 없는 진실 사이에서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던 것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 구성 ★★★★★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나생문 앞에서 만나게 된 나무꾼과 승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기묘한 재판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가발장수의 시니컬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리액션이 이야기의 흐름이 루즈해지지 않게 적절하게 배치되어있다. 산적인 타죠마루, 사무라이의 아내, 사무라이 혼령의 증언, 그리고 나무꾼의 목격담까지. 어느 하나 과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서사는 익살과 미스터리 사이를 능숙하게 오간다.
✏ 연기 ★★★★★
일본 중세 배경의 극이고, 이야기의 대부분이 어느날 벌어진 이 살인 사건의 주요 인물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연기 톤이 과장되었다. 배우들은 ‘진실을 가장한 자기서사’를 입체적으로 표현했고, 미스테리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분위기는 마치 한 편의 마당극을 보는 듯 했다. 살인 사건의 주요 인물인 타죠마루(산적), 사무라이, 사무라이의 아내는 각자의 시선에 따라 진지한, 처절한, 표독스러운, 익살스러운 인물을 모두 표현해낸다.
✏ 무대/연출 ★★★★★
무대에는 대나무 숲이 무대 천장까지 높이 솟아있다. 그리고 무대부터 객석까지, 공연장 내부는 비에 젖은 나뭇잎 냄새가 가득하다. 좌석에 앉는 순간부터 관객을 대나무 숲 속의 나생문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대나무 숲 뒤에 있는 고수의 타악 연주는 소리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고수의 북소리는 장면 전환을 이끄는 리듬이자, 진실을 아는 유일한 초월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연극 <나생문>은 일본 영화 중 명작으로 유명한 <라쇼몽>의 원작 소설인 <나생문>을 원작으로 만든 연극. 몇년 전에 라이선스 뮤지컬인 <씨왓아이워너씨>를 통해 라쇼몽(나생문)을 처음 접했다.
<씨왓아이워너씨>는 라쇼몽의 메인 사건인 무사가 살해당한 사건을 현대 미국 배경으로 변형한 ‘라쇼몽’과 9.11사태 이후의 센트럴 파크를 배경으로 한 ‘영광의 날' 두 가지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연극 <나생문>이 원작을 그대로 살렸다면, 뮤지컬 <씨왓아이워너씨>는 원작의 각색에서 더 나아가 실험적인 무대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객석이 삼각형의 무대를 둘러싸고 있어, 관객의 시선에 따라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진실, 거짓이 모두 다르게 다가온다.
작가, 연출이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 관객이 보는 장면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이였다. 제목 그대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 것.
결국 이 두 극은 다른 형식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진실인가?”
조금 많이 충동적으로 보게 된 작품이다. 공연 포스터의 짙은 일본풍이 낯설기도 했다. 딱히 기대하지 않고 앉은 객석에서 나는 뜻밖의 흥미로운 관극을 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속에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증언을 한 것은 나무꾼이였다. 당사자인 무사, 부인, 산적은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거짓을 지어내었다. 그리고 진실에 가까운 증언을 한 나무꾼 마저도 권력자들의 이해관계 속에 끼고 싶지 않아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사건의 중요한 증거품이 될 수도 있었던 무사의 칼을 훔쳐 달아났다. 그 와중에 중립 인물인 승려는 자신이 갖고 있던 편견에 사로잡혀 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
비를 피해 나생문으로 왔던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파는 가발장수만이 거짓 속에서 진실을 바라본다.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고 있고,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결국 이 미스테리한 사건은 비를 피하는 동안 들은 도파민이 터지는 이야기였다.
내가 예전에 그림을 하나 봤어요. 남자 하나가 밧줄을 잡고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림인데, 그 아래에는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고, 하얀 쥐와 까만 쥐가 밧줄을 막 갉아먹고 있는 그림이였어요. 그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밧줄에 매달려 있는 거라구. 옳으냐 그르냐 그런걸 따져서 뭐해? 그럴 틈도 없구 말이야. 안 그래요?
결국 현실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닐까나.
비가 그친 대나무숲에서 울려퍼지던 버려진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