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흐 헤스트>
자신의 온 세상을 글과 빛깔로 채운 동림과 향안의 모험 같은 생애.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던 이상의 말줄임표를 가슴으로 받아들였고,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함께 구축해낸 김향안의 삶은 오롯이 예술로 물들어 있었다.
✏ 파리에 정착한 향안과 환기, 그리고 함께 지내기 시작한 동림과 이상이 앞으로의 인생을 꿈꾸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계속해서 마음에 맴돈다. 파리를 넘어 뉴욕으로 또다른 도전을 꿈꾸는 향안과 김환기의 왈츠, 그리고 <날개>를 쓰다 막힌 이상을 데리고 미쓰비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자유로움’을 함께 느끼는 동림과 이상, 그들의 모습은 예술을 향한 갈망과 자유, 도전 그 자체였다.
✏ 동림과 향안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동림의 시간은 순행하고, 향안의 시간은 역행한다. 결국 극의 말미엔 동림으로서의 마지막, 향안으로서의 처음이 서로를 마주한다. (구분을 위해 향안이라고 표기했을 뿐 그 시점의 향안은 동림이다.) 미래의 인물이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는 익숙한 구조 속에서 이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과거의 인물인 동림이 도리어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향안을 응원하기 때문이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면서.
"우리 과거는 내가 이 시간 속에서 잘 지킬게. / 넌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 계속 꿈을 꾸고 멈추지 말아줘" - ‘변동림으로 남아’ 중에서
✏ 구성 ★★★★☆
시간의 방향을 달리하는 두 서사. 동림과 이상의 이야기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역순으로 흘러가는 향안과 김환기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의 자료화면을 보는 것 같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초반부터 비장하게 마무리되는 김환기의 서사는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 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덜거덕거리고 어색한 향안과 김환기의 이야기는 동림과 이상의 시간선에 맛물리며 점차 조화롭게 녹아든다.
✏ 음악 ★★★★★
전반적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넘버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수필가인 김향안, 그리고 천재 시인 이상의 글을 가사로 활용해 감성이 배가 된다. 극 내내 라이브로 연주되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선율까지 더해져 음악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 무대/연출 ★★★★★
추상적인 배경과 파스텔톤의 영상미, 그리고 김환기 화백의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활용된다. 시간을 오고가고, 상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상황을 영상과 조명이 부드럽게 표현해낸다. 특히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우주>를 활용한 영상이 인상적이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
이 문장이 <라흐헤스트>라는 제목을 설명함과 동시에, 이 작품의 정서를 표현한다. 변동림으로서, 김향안으로서 그녀는 예술가와 함께 살았고, 그들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어나갔다. 이상의 말줄임표를 이해, 공감하고, 김환기가 그리는 점과 선의 세계를 함께 향유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후에도 그녀는 그 잔상과 함께 자신의 언어, 색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이상을 다룬 작품은 그의 인생을 다룬 작품이든, 그의 인생을 모티프로 한 가상의 이야기든 꽤나 많았다. 하지만 <라흐헤스트>는 이상과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시선에서 그의 삶을 비춘다. 조력자로서의 이상은 이례적이지만, 경성 모던보이의 자유로움과 시인으로서의 천재성은 무대 위에서 여전히 빛난다. 그의 단명한 삶, 엉뚱한 천재성, 어두운 시대를 살아낸 고뇌와 고독이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연인에게는 똥차였을지언정…) 시대, 장르를 넘어 이상이라는 캐릭터가 사랑받는 것은, 그의 천재성과 예술에 대한 집념 때문이 아닐까.
4명의 배우가 모든 극을 끌고가는 소규모 뮤지컬인 점, 문학과 미술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어서 너무 잔잔하고 지루해질 수 있지만, 인물 간의 썸과 로맨스, 그리고 위트가 더해져 관객들을 즐겁게 만든다. 순행적 흐름과 역순행적 흐름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을 웃게 하는 장면이 극에 전체적으로 녹아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훌륭한 넘버 소화력도 이 즐거움에 한 몫 하고 있다.
향안이 동림에게 보내는 위로, 동림이 향안에게 보내는 응원. 그 교차점은 관객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