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하고도 눈물 나게 아름다운, 청춘의 파편

연극 <기형도 플레이> (#뒷북)

by Zoey J


One Sentence Review


오랜만에 본 한국의 일상에 맞닿아있는, 자극적이지 않은 시 같은 작품.

짠하기도 하고, 찌질하기도 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즐거움도 있는 기형도 시인의 청춘을 재해석한 옴니버스식 연극이였다.

불완전한 청춘과, 그럼에도 살아가게 되는 순간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장면의 여운


9편의 단막극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조치원>이였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은 <위험한 가계 1969>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단막극은 늦은 밤의 어느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버지와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다. 약간 스포일러를 하자면 아버지의 장례식에 대한 환상인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버지의 환상을 만난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남자가 종이와 펜을 붙잡은 채로 말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였다.

남자 : 이걸 적어야겠어요. 지금 내 감정.
아버지 : 아무리 꾹꾹 눌러쓴다고 해도 누구도 보지 못할거야.
남자 : 그래도 나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아버지 : 그래. 위로가 된다면 그래, 다 해라.

그리고 암전된 무대 위, 주인공이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마지막 구절을 꾹꾹 눌러 읽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

남겨진 감정을 꾹꾹 눌러쓰는 그 독백은, 시의 언어가 무대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였다.


01235b7d25237fab935c618d874631ed.jpg 기형도 플레이_위험한 가계 1969 (출처 : 맨씨어터 SNS)


별점 CHECK


✏ 구성 ★★★★★


9개의 단막극 일부는 기형도의 시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일부는 멋진 재해석이라고도 느꼈다. 일부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이 단막극들은 기형도 시인이 표현하려 한 상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현재의 슬픔, 그리고 이를 넘어 앞으로를 살아갈 생명력, 희망을 그린다.


✏ 연기 ★★★★★


9개 극의 22명의 인물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생활연기, 그리고 현실에 밀착된 표현이 여러 청춘의 감정선을 진정성 있게 담아냈다.


✏ 무대/연출 ★★★★★


오랜만에 보는 화이트 톤의 심플한 무대 구성이다. 무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의자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책장, 파일꽂이를 연상시키는 네 개의 기둥, 얇은 살대로 만들어진 통로가 전부다. 기둥은 책장이 되기도 하고, 책상이 되기도 한다. 단막극 진행 도중엔 암전을 거의 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 이런 무대구성은 적절한 선택이였고, 극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테마 단상


당장 눈 앞이 깜깜하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 무언가를 실패했을 때 엄청나게 큰 일이 일어난 것 같고,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일상을 열심히 살다가 지나고 보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도움닫기일 뿐일 경우가 많다. <기형도 플레이>는 막막함 속에 놓인 청춘들의 감정, 희망, 그리고 생명력을 담아냈다. 그리고 그 속에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



주절주절 더하기


극단 맨씨어터의 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많이 들었고, 이 극단에서 올린 <기형도 플레이> 초연은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늦게 접했다.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모든 회차가 매진되었던 후였다.

이번에 다시 돌아왔을 때,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여럿 함께 돌아왔고, 박호산 배우의 무대 연기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공연을 볼 이유는 충분했다.


9편의 단막극 중 가장 좋았던 <조치원>은 시의 분위기를 가장 잘 재해석한 작품이였다. 기형도의 ‘조치원’에 등장한 남자는 휴가를 나온 군인 제이, 삶의 터전을 떠나려는 케이, 이 두 명으로 재탄생했다. 시에 등장한 인물처럼 각각 외로움, 실패로 인해 삶을 끝내고 싶어하지만 조치원에 맛있다는 ‘조파닭’을 먹으러 가기 위해 하루를 더 살기로 한다. 그 둘이 기차칸에서 함께 내리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뭉클하다.


e4f98a6b36e586b33091b421deb903f4.jpg 기형도 플레이_조치원 (출처 : 맨씨어터 SNS)


인상 깊은 단막극을 하나 더 꼽는다면 <질투는 나의 힘>이다. 재미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극이였고, 허세와 찌질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인물이 이끌어가는 관계가 매력적이였다. 등단하지 못하고 늙어가기만 하는 작가 지망생과 대학생 때 캠퍼스 커플을 한 죄로 15년 째 끌려다니는 작가의 관계가 너무 짠하고도 웃기다. 말만 번지르르한 작가 지망생의 ‘질투는 아의 힘’ 시구를 활용한 허세는 상대방과 구경꾼들을 환장하게 한다. 그리고 예전 제자였던 신인 작가와의 만남으로까지 그 허세가 연결되며 이 극의 유머가 한 차원 더 높아진다. 박호산 배우와 서정연 배우의 연기호흡은 이 희극의 감정선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dacbc9eae243de4ccff98f00ac59d596.jpg 기형도 플레이_질투는 나의 힘 (출처 : 맨씨어터 SNS)


이 외에도 <소리의 뼈>, <바람의 집>, <빈집>, <기억할 만한 지나침>,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까지 모든 단막극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형도 시인이 그린 청춘의 모습을 유쾌하게, 애틋하게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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