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해적> (#뒷북)
2인극으로 아름답게 재탄생한 소설 <보물섬>. 츤데레와 아동학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해적 선장은 허술하지만 멋진, 좋은 어른 캡틴 잭으로 재탄생했다. 각자 1인 2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극의 재미를 더했고, 자칫 주객전도가 될 수도 있는 앤과 메리의 이야기는 과하지 않게, 절묘한 비중 조절로 살려낸 구성은 훌륭하다.
가장 여운을 남긴 장면이라면 주인공인 루이스의 펜 끝에서 캡틴 잭, 앤, 메리가 살아나는 장면이다. 캡틴 잭과의 짧은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루이스는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바다 위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이들의 여정은 실패,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종이 위에서 ‘해적의 황금시대’라는 꿈과 낭만으로 가득찬 이야기로 살아난다. 관객은 이 순간 루이스의 시선을 따라 이들의 짧지만 행복했던 여행을 함께 기억하고 상상하게 된다.
✏ 구성 ★★★★☆
배우들이 각각 1인 2역을 하는데,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두 가지 캐릭터의 표현이 꽤나 상반되어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과거, 현재의 연결 지점이 매끄럽지 않은 장면이 있어 약간의 혼란이 있으나, 핵심 관계의 서사는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 음악 ★★★★★
귀에 맴도는 중독성있는 노래와 아름다운 노래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장조와 단조를 활용하여 노래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활용이 훌륭하다. “이 노래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싶은 순간이 여럿 있다.
✏ 무대/연출 ★★★
두 명의 배우만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 연기력과 텍스트의 밀도가 훌륭하다. 다만 일부 장면에서 동선이 잘 정리되지 않아 액션씬의 긴장감이 다소 아쉬워지는 부분이 있었다.
허술하지만 단단하고, 무모하지만 따뜻한 어른인 캡틴 잭은 오히려 관객에게 위로가 된다. <해적>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다.
<해적>은 몇년 전 초연 때부터 수작이라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들었고, 내가 공연을 소홀하게 보던 사이 생긴 ‘스페셜 커튼콜’이라는 것 덕분에 꼭 보고 싶은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요새 대학로에서 자주 보이는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배우들의 다채로운 표현도!
(스페셜 커튼콜 : 커튼콜까지 모두 끝낸 후 공연 중 일부 장면을 재시연하고, 사진, 영상 촬영이 허용되는 이벤트.)
<보물섬>은 익숙한 이야기지만, <해적>은 그 이야기를 섬세하게 비틀어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두 병의 배우가 무대를 밀도있게 채워나가는 모습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루이스가 되어 이들과 함께 해적선을 타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해적>은 해적의 모험담을 넘어, 각자가 속해있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싸우지 못하는 해적 잭, 아버지의 죽음에 갇혀 있던 루이스,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남자 옷을 입고 바다를 누비는 앤과 메리. 이들의 우정과 유대는, 마음속 상처를 보듬고 서로를 지켜주는 동료애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단순한 해적의 모험담이 아니라, 결국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