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빵야> (#뒷북)
사람이 아닌, 사물인 99식 장총 ‘빵야’가 온 몸으로 겪은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까지 이어진 현대사의 비극.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폭력의 도구가 되어야 했던 ‘빵야’의 비극은, 그 시절을 다룬 어떤 창작물보다도 깊고 슬프게 다가온다.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의 손을 오가며 원치 않던 폭력의 도구가 된 빵야의 마지막을 위한 오케스트라 장면. 단 한 번의 발사 기회가 남은 빵야를 위해, 나나는 드라마 대신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그의 생애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발은 총으로서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악기로서 선율이 되어 흐르고, 그렇게 빵야는 해방된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픈 역사를 견뎌낸 존재들을 기리는 진정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 볼거리 ★★★★★
주인공인 나나의 작업실, 드라마 소품 창고 등의 현실 배경에서부터 극 중 등장하는 나나의 시나리오 속 장소들까지 상상력을 동원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간단한 소품들을 활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활보한다.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을 물어본다면 악기가 되고 싶었던 99식 소총 ‘빵야’가 악기로 참여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장면이다. 시나리오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악기를 들고 등장해 빵야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연주를 시작하는데,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
✏ 구성 ★★★★★☆
일제강점기에 제물포의 총기 제조공장에서 생산된 99식 소총 ‘빵야’가 21세기의 드라마 소품 창고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일대기가 시나리오 작가 나나의 손에서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드라마 작가인 나나가 창작을 하며 겪게 되는 현실적인 이야기들과 빵야가 약 90년이 넘는 시간동안 겪은 주인들과 전쟁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불협화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나와 빵야의 입으로 풀어지는 이야기들은 주로 방백과 둘 사이의 대화로 진행이 되고, 시나리오 속 인물들의 대사 또한 방백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대사와 연기를 통해 관객들은 아픈 근현대사 속 이야기로 빠져들게 된다.
✏ 배우/연기 ★★★★★
주인공이 사람이었다면 지닐 수 없었을 100년이라는 시간. 주인공을 사람이 아닌 99식 소총으로 치환해 그 100여년의 시간을 표현해냈고, 그 장총의 얼굴은 앳된 얼굴을 가진 배우 전성우가 표현했다. 전성우(빵야 분)는 비극적인 역사로 인해 지치고 낡아진 퇴역 군인의 모습이었기에, 나나와 소통하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고 그 아픔을 해소해가는 모습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침내 악기가 되어 현실에서 벗어나는 빵야의 모습은, 긴 여운을 남긴다.
5년동안 작품을 한 편도 쓰지 못한 작가 나나는 어느 매체에서든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 이진희였다. 이진희 배우의 나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창작의 꿈을 놓지 않는, 오늘날의 청년상을 그려냈다. 그리고 빵야와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자본주의의 논리,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소비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모습은 아픈 역사를 대할 때 우리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빵야의 아픔에 공감하며 흘리는 나나의 눈물은 관객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게 한다.
연극 <빵야>는 김은성 작가의 희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은성 작가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2016년에 두산아트센터에서 처음 공연된 <썬샤인의 전사들>을 통해 김은성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빵야>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김은성 작가는 한반도의 아픈 비극을 픽션으로 그리면서도, 그 시절의 상처와 기억을 상징과 구조 속에 정교하게 녹여내는 능력이 인상 깊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하던 주인공 한승우가 가상의 대형 참사인 ‘케이타워 붕괴 사건’으로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절필하지만, 몇년 후 꿈속에 나타난 딸의 부탁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가 과거 군 복무 시절 우연히 손에 넣은 수첩 안에 담긴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이 수첩 속 이야기들은 제주 4.3 사건부터 이념 갈등의 시대를 거쳐, 2016년의 세월호 참사로 이어지는 아픔을 포착한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어린 딸이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썬샤인의 전사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빵야>는 의인화된 소총 ‘빵야’를 통해 상징적으로 전쟁, 역사의 비극을 나타낸다.
연극 <빵야>는 초연 당시에 놓쳤지만, 지난해 다시 무대에 오른 덕분에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대에서 보고싶어하는 배우들이 돌아와서 더욱 기쁘게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18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의 연극을 보려니, 엉덩이와 허리가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대학생 시절 관람한 김은성 작가의 <썬샤인의 전사들>은 눈물이 거의 없는 나조차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몇 안되는 작품이었기에, 이번에도 기대가 컸고, 그 기대는 배신당하지 않았다.
내가 공연을 보러 다닌 기간이 짧지 않다. 잠깐 몇 년 공연을 보는데 소홀한 사이 좋아했던 배우들의 차기작이 뜸해지고 처음 보는 배우들이 많아진 요즘,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가장 좋은 점이 있다면 공연의 영상화 작업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옛날 내가 좋아하던 시절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요 근래의 공연은 영상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빵야> 역시 전성우와 이진희 배우가 출연한 공연 실황이 CGV에서 개봉되었다. 공연 영상은 내가 보지 못한 각도로도 자세히 볼 수 있고, 깔끔한 음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앞으로도 <빵야>를 영상으로 볼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높을텐데, 이 글을 보는 분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