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인공지능 로봇의 서툰 감정 표현 덕분에, 올리버와 클레어가 느꼈을 기쁨, 슬픔 등의 감정들은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다가온다. 행복했던 기억과 함께 혹은 이전과 다르지 않게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갈 올리버와 클레어의 앞으로가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닐까.
올리버와 클레어가 제주도로 가서 반딧불이를 마주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본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다. 모두 꺼진 조명, 형광 초록빛 영상으로 연출된 반딧불이, 그리고 그 빛 사이를 걷고 뛰는 두 로봇의 모습은 몽환적이고도 벅찼다. 헬퍼봇이라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숲을 자유롭게 뛰노는 그들은 손에 닿는 나뭇잎, 풀잎 하나에도 눈을 반짝인다.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며 그들의 기쁨과 벅찬 감정을 대신 느끼고, 그 감정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 구성 ★★★★★
떠난 주인을 그리워하며, 그를 찾아가기 위해 유리병을 판 돈을 모으고 있는 올리버, 완전히 멈추기 전에 반딧불을 보기 위해 떠나는 클레어. 이들의 우당탕탕 로드트립 속에서 감정을 자각하고 기억, 앞으로의 미래를 선택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완성도 있게 펼쳐진다.
✏ 음악 ★★★★★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화, 담백한 어쿠스틱 넘버가 계속해서 귀에 맴돈다. 감정을 다루는 데 익숙지 않은 로봇들의 서툰 감정 표현이 오히려 관객들이 더 깊게 감정이입하게 한다. 특히 올리버와 클레어의 듀엣곡들이 즐거움과 슬픔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올리버와 클레어가 자신들이 상상해 온 이상적인 러브스토리를 풀어놓는 ‘My favorite love story’라는 넘버가 가장 좋았다. (모든 넘버가 다 좋지만!!)
✏ 무대/연출 ★★★★★
아날로그 분위기의 따뜻한 색채를 띈 무대, 그리고 근미래의 사이언스 픽션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한 조명과 영상이 절묘하게 섞인다. 근미래 배경과 대비되는 LP, 우산, 화분 등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의 소품, 무대가 로봇들이 감정을 느끼는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큰 역할을 한다.
끝이 예정되어 있는 사랑 이야기.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이 이야기는 불안과 희망 속을 걷는다. 로봇은 끝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사람처럼 수명이 있으며, 그들이 겪은 모든 기억과 경험은 ‘데이터’의 형태로 남는다. 그리고 본인의 선택으로 기억을 ‘삭제’할 수 있다. 올리버보다는 신형이지만 내구성이 약한 부품으로 만들어진 클레어에게는 이 끝이 빠르게 다가온다. 클레어는 자꾸 떨어지는 부품을 제주도의 숲 속에 던져버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하루하루를 붙잡아보려고 하는 올리버를 바라보며 클레어는 결국 올리버와 함께 서로를 사랑한 기억을 지우고, 별로 불만일 것도 없이 재즈 잡지와 레코드 플레이어만 있다면 최고였던 그 시절의 본인들로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 기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고,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클레어를 지켜본다.
클레어의 선택은 기억을 지우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때때로 클레어를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정말 기억을 지운 것 같을 때도 있고, 기억을 지우지 않은 것 같이 표현할 때도 있다. 둘의 선택이 어떻든 결말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이 둘이 하루하루를 기억과 사랑의 흔적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해피엔딩’ 일 것이다.
로봇을 다룬 이야기들은 보통 인간과의 갈등, 지성의 경계, 권리의 문제 등을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은 인공지능 로봇들에게 금기시되는 감정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순수하면서도 성숙한 관계를 보여준다. 그 감정과 관계를 담백하게 표현해 내 로봇들이 시스템, 알고리즘, 학습으로 느낄 감정을 관객들은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좋은 창작극을 발굴해 온 우란문화재단과,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가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뮤지컬이다. 그리고 정욱진, 전미도, 고훈정 배우의 트라이아웃 공연 이후 소문만 무성하던 이 작품은 300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브로드웨이까지 진출, 토니 어워즈 6관왕에 올랐다. (미국에서 이 작품을 보려면 70만 원 이상 내야 한다고 하던데….)
최근에 미국에서 너무 유명해진 극이라, 뒤늦게나마 내가 본 <어쩌면 해피엔딩>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고 싶었다. 올해 하반기에 1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던데, 치열한 티켓팅이 예상된다. 내 자리는 물론,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의 자리도 있길 바라며, 이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