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뒷북)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도덕, 윤리, 그리고 사랑이라는 잣대. 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 놓여진 대니, 헬렌, 리암, 이 세 인물 사이의 팽팽한 심리전이 일품이다.
결국 대니는 도덕, 윤리의 선을 넘어 ‘가족’을 지켰지만,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헬렌은 그런 대니를 보며 동생인 리암에게 이제 더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이 소란에 결국 대니와 헬렌의 아들이 깨어난다. 칭얼대는 아이를 향해 리암이 달래기 위해 다가간다. 그런데 아이의 눈은 카메라로 대체되어 있고, 이 카메라는 무대 뒤편 영상을 통해 관객과 연결된다. 리암은 카메라 렌즈를 직접 응시한 채 아이를 달래는데, 그의 눈빛에는 ‘가족’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광기가 서려있다.그 눈빛은 관객을 향해 ‘당신들은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나’를 묻고 있는 듯했다.
✏ 구성 ★★★★
피칠갑을 하고 부부의 오붓한 저녁식사 사이에 등장한 와이프의 동생. 공권력을 믿지 못한 채 동생을 지키려는 부인과, 다쳤을 사람으로 인해 신고를 하려는 남편, 그리고 계속해서 모순되는 증언을 하는 동생 사이의 심리스릴러스러운 팽팽한 대립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윤리와 가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동안 저렇게까지 이어져야하는지는 의문이다.
✏ 연기 ★★★★★
세 명의 배우만으로 진행되는 심플하지만 밀도 높은 구성이 돋보인다.
특히 리암 역을 맡은 류세일의 모순된 진술과 광기는 극의 불안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헬렌 역의 정세별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점차 광기로 물드는 인물을 탁월하게 표현했고, 대니 역의 이강욱은 이성적 판단과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 무대/연출 ★★★★★
화이트톤으로 미니멀하게 구성되어있는 한 가정의 다이닝룸이 중앙에 배치되어있고, 사이드와 무대 뒷편을 활용해 집 내부의 오픈되어있지 않은 공간과 외부 공간을 표현했다. 화이트톤의 공간은 리암의 피비린내 나는 비밀과 대비되어 가족과 도덕 사이의 딜레마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헬렌과 대니의 아들의 시선을 표현한 카메라 앵글은 관객들을 그 딜레마 속으로 완전히 끌어들인다. 무너져버린 대니, 리암을 외면하는 헬렌, 자신의 조카를 마지막 동앗줄처럼 붙잡는 리암까지. 관객들을 불편한 상황으로 끌어들이는 연출은 훌륭했다.
가족과 도덕. 어떤 것을 우선으로 두어야할까?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가족과 도덕 사이의 딜레마를 ‘침묵’, ‘타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가족의 결핍 속에서 살아왔던 헬렌과 리암은 공권력을 불신하며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지키기 위해 침묵과 타협을 선택한다. 반면 대니는 공권력을 통해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평범한 가족이 겪는 도덕적 딜레마와, 평범한 줄 알았지만 침묵, 타협을 통해 숨기고 있던 속마음까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폭력 사건이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이 두려움, 불안, 생존 본능까지 파고든다. 그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계속해서 가족과 도덕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세워진다.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우란문화재단의 연극이었다. 우란문화재단이 발굴하는 작품들은 보통 짧게 공연되어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12회 공연 중 하나를 운이 좋게 볼 수 있었다.
영국의 극작가 데니스 켈리의 희곡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본능, 두려움, 불안에서 더 나아가 현대의 사회적 문제인 공권력에 대한 불신, 영국 사회 내의 은밀한 인종차별 문제까지 드러냈다. 이런 사회문제는 한국에서도 만연한 부분이라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주인공 각각이 갖고 있는 결핍과 불안, 두려움은 소극장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시너지를 일으켜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감을 더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정새별, 류세일 배우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좋은 배우를 알게 된 것 같다. 이강욱 배우는 TV 드라마들을 통해 익숙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차기작이 기대되는 배우들이다.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식 공연으로 돌아올 날이 기다려지는 작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