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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l 09. 2019

왜 산티아고 길에 중독되는 것일까?    

다섯 번의 산티아고 길을 떠난 후  

“나는 이번이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이야.” 


칠 년 전 처음 산티아고 길을 걸은 후, 파리로 돌아가기 전날 길 위의 한 바에서 만난 다른 순례자와 대화를 나눴다. 남편과 나는 단지 일주일을 걸었을 뿐인데도 결고 쉽지 않았는데, 두 번이나 한 달 가까이 걷는다니. 그녀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넘쳤다. 가고 싶은 곳만 다 가고 해보고 싶은 것만 다 해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같은 길을 그것도 똑같은 고생을 사서 하려고 또 가다니. 


그때만 해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 '미친 사람'이 되어, 그다음 해에 혼자 한 달 동안 프랑스 길을 걸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고도 부족해서 약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 번을 더 걷기 위해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게다가 이 길을 처음 함께 했으며, 그 후로도 세 번이나 함께 걸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두렵고 불안한 시기였던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초반의 나의 삶의 중심에는 산티아고가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고, 삶도 사랑도 모두 시작도 제대로 하기 전에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때. 너무 자주 몰려오는 절망감과 공허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점점 더 깊이 빠지고만 있을 때 이 길을 걸었다.


그렇게 산티아고 길을 여러 번 걷다 보니 산티아고 길의 중독자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똑같은 길을 여러 번 걸었다는 사람들도, 나와 남편처럼 여러 번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스페인이 멀기도 하고 산티아고 길을 걸을 시간을 빼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 여러 번 걷는 게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비행기로 몇 시간 이내에 올 수 있으며 일 년에 거의 한 달 가까운 휴가가 보장되는 유럽인들에게는 마음먹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가까운 프랑스에 살지 않았으면, 다섯 번이나 가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비교적 가깝고 시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금쪽같은 휴가 혹은 여유분의 시간을 뙤약볕에서 걸으러 간다는 것은 어떤 결심 혹은 절박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역시 다섯 번 다 완주로 걸었던 건 아니고, 프랑스 길을 한 달 넘게 걸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일주일을 걷기도 하고 보름을 걷기도 했다. 덕분에 북쪽 길을 시작으로 프랑스 길, 포르투갈 길, 영혼의 길 등의 다양한 산티아고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여러 해를 거쳐 하나의 길을 끝내는 걷는 것은 한 번에 완주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짐에 따라 한 해 한 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더 확연하게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길을 걷는 방식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크게 틀리지 않았다. 길을 걷는 모습이 변해가면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도 변했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변해가면서 길을 걷는 모습도 변해갔다. 길과 삶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많은 순례자들의 말처럼 까미노는 삶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처음 걸었다는 사람은 봤어도 한 번만 걷는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한 번 걸었던 이들은 꼭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를 꿈꾸곤 했다. 육 년 전 산티아고 프랑스 길에서 만나서 아직까지 연락하는 한국 친구도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퇴직하면 아내랑 같이 다시 갈 거야.' 나 역시 매번 까미노를 마칠 때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라고 외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산티아고를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뛴다. 


ⓒ 주형원




"왜 굳이 거기까지 가서 걸어야 해요? 걷고 싶으면 여기서도 걸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몇 해 전 산티아고 길로 다시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지인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산티아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물었다. 걸을 곳은 사방천지인데, 왜 굳이 해외까지 가서 걸어야 하냐는 무언의 비난이 섞인 그의 말투에 잠시 당황한 후 대답했다. 


"맞아요. 어디서든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그의 말이 맞다. 


걷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든 걸을 수 있으며,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고 해서 속히 말하는 것처럼 어떤 대단한 깨달음이 당장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 또한 다섯 번이나 걸었을지 모르겠고, 또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이 걸을지는 모르겠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도중에 만나 산티아고 길에 베소(키스)라는 예쁜 이름의 알베르게를 열고 길 위에서 순례객들을 맞이하며 살고 있는 젊은 네덜란드 이태리 부부가 있는데, 함께 저녁을 먹던 중에 그들이 한 말이 있었다.


"어디든지 육일 이상을 걸으면 변화가 시작돼요" 


나에게 왜 굳이 거기까지 가서 걸어야 하냐고 따지듯 물었던 사람이 과연 자신이 있는 곳에서라도 일정 기간 걸어본 적이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꼭 산티아고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변화를 위해 걸을 수 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렇게 걸을 정도로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결국은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없이 단지 유명한 길이라고 떠났다가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혹은 중간중간 여러 유혹에 빠질 수 있다.


ⓒ 주형원 




그럼에도 산티아고는 길은 내게는 정말 특별하다. 


책을 쓰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뤄준 곳이고, 처음 이 길을 함께 걸을 때는 헤어진 연인이었던 지금 남편과의 깨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해 준 길이다. 여태껏 살면서도 몰랐던 나 자신의 여러 면에 대해 알게 해 준 곳이고, 평생 잊지 못할 여러 만남이 있었던 곳이며, 무엇보다 삶에 대한 가치와 태도를 다시 배운 곳이다. 80년대에 처음 산티아고 길을 걸은 후, 지금까지 거의 매년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스페인 순례자 파코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80년 대에 산티아고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얼마 없었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는 제대로 길 표시도 안 돼있을 때였는데, 그는 길을 마치고 다른 스페인 자원봉사자들과 지금의 노란색 이정표를 길 곳곳에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성인이 된 두 아들과도 여러 번 산티아고 길을 걸었고, 오십이 넘은 지금도 거의 매년 한 달 넘게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말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필요한 것은 티셔츠 두 장과, 바지 두 개뿐이야. 이곳에 올 때마다 살아가는데 이것 외에 결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


이런 말을 하는 건 파코뿐만은 아니었다.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을 자신에게 환기하고자, 많은 산티아고 길 중독자들은 다시 길 위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몇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거의 매년 짬을 내서 걷기 위해 오는 전 세계의 여러 순례자들을 보았다. 산티아고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한 번의 순례길이 어느 정도 자신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이 변화는 늘 그렇듯 일상에 돌아가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는 했으니 말이다.


혹은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유토피아가 그리워서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의 삶은 분명 현실의 삶과는 다른 무엇이었으니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 혹은 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와는 달리, 산티아고 길에서는 모두가 산티아고라는 같은 목적지를 가지고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풀었다. 진실했고 자유로웠다. 길 위에서는 모두 벌거벗은 영혼이었다.


나 역시 마음이 답답하고 더 이상 나아갈 삶의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나 자신에 실망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상처만 받을 때. 어김없이 내 마음은 나를 산티아고 길 위에 올려놓았다. 길 위에서 회복한 영혼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삶의 길을 걸었다. 이 정도면 나 역시 산티아고 길의 중독자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중독에서 이제는 헤어 나와야겠다고 하면서도, 세상에는 꼭 나쁜 중독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수업이 하루 24시간인 학교에 살아 있는 한 그 수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수업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인생수업> 중 -  


ⓒ 주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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