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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l 04. 2019

09. 쿠바 해변에서 보낸 사랑의 날

“여러분 바라데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2월 14일 사랑의 날입니다. 사랑의 날에 여러분에게 많은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불리는 쿠바의 바라데로에 도착하자, 우리의 버스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시더니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디아 델 아모르. 사랑의 날이라니. 젊은 사람도 아니고 연세가 지긋한 쿠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이런 멘트(?)를 날리시니, 역시 쿠바가 사랑의 나라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버스 기사 아저씨뿐만이 아니었다. 까마구에이에서 오는 버스에서 우리 뒤에 앉은 중년 쿠바 커플 중 쿠바 아저씨는 아침 아홉 시부터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라 아저씨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들어보면 거의 다 비슷한 통화 내용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여서 전화했어. 어떻게 지내? 행복한 하루 보내기를 바라.”


특별히 로맨틱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우리가 명절 때 지인들에게 인사 돌리듯이 말한다. 어쩌면 밸런타인데이는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묻는 핑계에 더 가까웠다. 어제도 까마구에이 거리 곳곳에서 음악이 울려 퍼져서 도시가 축제 분위기여서 민박집 주인 딸에게 무슨 날이냐고 물어봤다.


“내일이 밸런타인데이라서 그럴걸”




© 주형원


하긴 사랑이 목숨처럼 중요한 국가에서 밸런타인데이가 어느 나라의 명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엄마한테 버스 기사 아저씨와 뒤에 앉은 승객의 전화 통화 내용을 전해주면서 말했다.


“엄마. 쿠바 사람들도 진짜 오지랖이야. 나이 드신 분들이 저렇게 밸런타인데이에 소란을 떠시니”


내 말에 바로 동의할 줄 알았던, 나름 보수적인(?) 엄마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왜 얼마나 멋있어.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거지”


엄마 말이 맞았다. 게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도 명절이나 지인들의 생일 때도 전화가 아닌 카카오톡과 이모티콘으로 대체한 지 오래다.


사랑의 도시라고 불리는 파리에 오래 살면서도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인 날이라는 인상 외에는 받아본 적 없는데, 쿠바에서는 밸런타인데이가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선물을 교환했다.


오 년 전에 왔을 때도 우연히 아바나에 도착한 지 다다음날에 밸런타인데이였어서, 쿠바가 어떻게 이 날 축제의 장으로 변하는지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국가 중에 성별과 연령 구분 없이 가장 밸런타인데이를 제대로 즐기는 국가는 쿠바다.


나 역시 오 년 전에 쿠바에 왔을 때, 밸런타인데이가 시작하는 새벽, 다른 여행객들과 저녁을 먹고 민박집에 돌아가기 위해 잡아탄 인력거 청년에게서 여태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솔직하고 황당한 구애를 받았었다.


"나는 애가 둘 있고 두 번 이혼했어. 만약 네가 좋다면 이번 주말에 너와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그의 나이는 당시 서른을 앞두고 있던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렸다. 실제로 쿠바에서는 기혼자 중에 이혼을 한 번도 안 한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사랑도 혁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피델 정부는 혁명 이후 이혼 절차를 단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도록 법으로 제정하였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쿠바인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의 황당한 표정을 읽지 못한 인력거 청년(?)은 한 술 더 떠서 말했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이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데이야. 이런 날이 시작되자마자 너를 만난 건 운명이 아닐까?"




© 주형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캐리비안 해변이라고 불리는 바라데로 해변에 도착해서 반짝이는 에메랄드 바다를 보니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지난번 혼자 여행할 때는 버스 갈아탈 때만 잠시 들렸던 곳이다. 엄마도 잔뜩 들떠서 말했다.


“저기 야자수 나무 좀 봐. 저렇게 열매 열린 야자수 나무는 태어나서 처음 봐.”


맥주 한잔하러 들어간 해변의 바에는 쿠바 인들로 가득했는데, 신나는 음악에 술을 마시다가도 어느 순간 모두 일어나서 골반을 돌린다. 서로 아는 사람끼리 만나면 밸런타인데이여서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밸런타인데이는 다른 곳에서처럼 결코 연인들만을 위한 날이 아니었다. 쿠바에서 사랑은 모두에게 축복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사랑의 날은 모두를 위한 날이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름다운 바라데로의 해변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절로 행복해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해변과, 아름다운 사람들. 정말 이 나라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낙천적이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지. 별거 아닌 모든 순간들을 200퍼센트 즐기는 사람들. 현재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이런 행복의 능력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 주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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