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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ug 22. 2019

남편의 생일, 생애 첫 미역국  

아침에 눈뜨자마자 쌀을 씻어 밥을 올리고, 불린 미역을 고소한 들깨 기름에 볶기 시작했다. 마늘까지 함께 넣고 볶기 시작하자 정겹고 반가운 냄새가 집안에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거실에 있던 남편은 감탄하며 외쳤다.  


"너무 맛있는 냄새난다."


이렇게 말하면 평소에도 줄 곳 요리하는 아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집에서 거의 요리를 안 한다. 요리사 남편을 뒀다 어디 써라고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할 줄 아는 요리도 별로 없고 내가 하는 요리보다 남편이 하는 게 훨씬 더 맛있다는 핑계로 집에서 설거지 담당을 하고 있다. 부끄러운 고백 하나 하자면 정식으로 미역국을 끓여보는 것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늘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늘 그렇듯 뻔뻔하고 당당하게 외쳤다.


"내일은 당신 생일이니까, 내가 아침에 미역국 해줄게. 소고기 미역국 해줄까 아니면 굴 미역국 해줄까?"


굴 미역국을 먹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한국 갔을 때 사서는 단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백종원의 집밥 메뉴(이 책도 남편이 교보문고에서 사진을 보고 샀다)를 처음으로 열어보았다. 다행히 미역국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해당 페이지를 찾아서 펼쳐보고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소고기 미역국이었다. 낭패였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에겐 인터넷이 있으니까. 찾아보니 역시 여러 블로거분들이 친절하게 사진과 함께 레시피를 올려놓으셨다.


휴.


쓱쓱 흩어보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자신감 게이지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노련한 주부(?)처럼 볶은 미역에 쌀뜨물에 붓고 저을 때만 해도 속으로 성공을 외쳤다. 국을 한 수저 떠서 간을 보니 간도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멸치 액젓 덕분에 얼추 맞는 거 같았다. 미역이 너무 큰 거 같아 가위로 좀 잘라주고, 십오 분 정도 끓인 후 식탁에 내왔다. 비주얼도 이 정도면 과히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남편은 잔뜩 신나 있었다. 그는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 시댁 식구들이 있는 단체방에 올려 자랑을 했다. 남편이 맛을 먼저 보자, 나도 얼른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요리를 하면서 솔솔 풍기는 냄새에 군침이 계속 돌던 참이었다. 근대 뭐가 이상했다. 미역이. 미역이 질겨도 너무 질겼다. 내가 기억하는 미역국의 미역은 항상 부드럽고 연했는데 이건 빡빡하고 질긴 게 비닐봉지 씹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비닐봉지를 씹어본 경험은 없다).


뭘 잘못한 걸까?



고개를 돌려보니 남편은 '음 맛있다'를 연발하며 순식간에 미역국 큰 그릇 하나를 거의 다 해치우고 있었다.


"괜찮아?"

"엄청 맛있는데. 정말 고마워. 제주도에 와있는 거 같아. 국에서 바다향이 나는 거 같아."


남편은 우리가 이번 봄에 놀러 갔던 제주도까지 언급하며 말 그대로 과찬을 퍼부었다. 미역이 조금 이상하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생일날 아침 저토록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니 어느새 나도 미역국이 맛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맛있다. 이 미역국은 맛있다.' 주문 가까운 자기 최면의 결과인지, 나도 미역국을 벌써 두 그릇째 먹고 있었다. 평소에 먹는 양이 나보다 많지 않은 남편도, 두 그릇째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물었다.


"근대 왜 한국에서는 생일날 미역국을 먹어?"


순간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생일날 미역국을 먹지?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나 역시 궁금해 한적도 없었던 거 같다. 그냥 늘 그래 왔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다.


"글쎄..."


그러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보통 아이를 낳으면 산모가 미역국을 먹거든. 산모에게 좋다고 해서. 아이가 태어난 날 엄마가 먹는 음식이라, 생일 때 먹는 게 아닐까?"


전혀 확실하지는 않은 소리였지만. 말하다 보니 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나중에 찾아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편은 내 말에 집중해서 귀 기울이며 '아'를 반복했다. 남편의 반응에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미역국은 시험이나 면접이 있을 때는 보통 잘 안 먹어."

"왜?"

"미끄러질 수 있으니까"


남편의 눈은 휘둥그레 지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미역국 하나 가지고 우리는 아침을 먹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패한 미역국이지만 이 정도면 실패한 생일 아침은 아니지 않을까? 내년에는 좀 더 맛있는 미역국을 반드시 성공하리라 결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는 뭘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되새겨본다. 요리사 남편이 있으니 요리를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나의 게으름에도 조만간 종지부를 찍게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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