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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ug 25. 2019

그리운 내 생애 첫 상사

"내일 반차를 내고 싶은데요."

"왜요? 어디 가세요?"

"아니요. 시위에 참여하려고요."

"시위요?"


그는 깜짝 놀라더니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해야죠. 반차는 따로 내지 마시고, 먼저 퇴근하세요. 대신 오후에 해야 하는 일은 저녁에 집에서 하도록 해요.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요."


십 년 전.


유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잡은 첫 직장이었다. 직장 생활도 사회생활도 모두 처음이었다. 직원 스무 명 남짓의 작은 회사였다. 다양한 언어로 된 자료를 참고하여 정부 기관과 기업들에 정보 및 보고서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어차피 직장에 대한 큰 꿈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던 나는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벌 곳이 필요했다. 불어와 영어를 하는 사람을 찾기에 별생각 없이 지원했다. 면접 이후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회사에 전화를 했다.


“연락을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으셔서요.”


삼 일 후.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회사의 이사는 여태껏 면접 본 사람 중에 연락이 없는데 먼저 연락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뽑았다. “보통 연락이 없으면 떨어졌나 보다 하고 연락을 하지 않거든."




지금 생각하면 무슨 패기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뭘 몰라서 그랬을 테지만, 참 용기가 가상하던 시절이었다. 회사에 들어가서 나는 금융팀에 배치되었고, 내 생애 첫 상사를 만났다. 서른 중반의 그는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던 중 함께 공부하던 아내가 비자가 거절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과정을 다 마치지 않고 아내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직장을 잡게 되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큰 증권회사에서 근무했었던 그는 똑똑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회사에 들어간 지 삼일인가 지났을 때, 그는 나를 불러서 제안을 하였다.


"며칠 동안 보면서 본인이 느꼈던 이곳 시스템의 문제라든가, 우리 회사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보고서에 관한 의견을 솔직하게 정리해서 주실 수 있겠어요?"


그에게 다음 날 몇 페이지로 정리한 짤막한 보고서를 건넸다. 그걸 읽고는 그가 팀 점원을 회의에 소집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걱정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모두가 모이자 말했다. "굉장히 잘 썼고.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모두 불렀어요. 한 번 같이 읽어보고 다들 각자의 의견을 주면 어떨까요?"


나는 회사에 한 다리밖에 안 거치고 있었다. 회사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실컷 배우로 다녔고, 그 역시 늘 칼퇴를 권장했다. "시간 됐는데, 안 가고 뭐해요? 빨리 가세요." 그는 내가 회사에 오래 다니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늘 꿈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퇴근 후에 다큐멘터리를 배우고 첫 단편 다큐를 서울의 한 인디 극장에서 상영하게 되었을 때, 가장 반색을 한 것도 그였다.


"저도 내일 휴가인데. 혹시 괜찮으면 내일 만나기로 한 친구랑 같이 다큐 보러 가도 괜찮아요?"




그렇게 그는 내 생애 첫 다큐 상영회에, 자신의 전 직장 동료와 함께 와서는 격려해 주었다. "꿈을 항상 잊지 마세요." 직원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장 성실하게 일하며 모범을 보였고, 자신보다 낮은 직급이어도 나이가 더 많으신 분이 있으면 깍듯이 대했다. 팀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했고, 맑고 투명한 사람들이 그렇듯 모두들 자신처럼 정직하고 착하리라 생각했다. 팀에서 가장 막내였던 나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의 눈에 살짝 눈물이 도는 것을 보았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뭘 하고 싶어요?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야죠."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상사가 다 저런가, 생각했다. 아직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여러 회사에서 일을 했다. 분야도 천차만별이었고, 몇몇 직장에서는 나름 사회에서 날고 긴다는 이들도 상사로 알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사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니 꼭 상사가 아니더라고 삭막한 사회생활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미안해졌다. 그때 더 감사하고 더 고마워할걸.


자신도 꿈을 이룰 테니, 나도 꼭 내 꿈을 이루라고 말하던 그 상사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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