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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Sep 03. 2019

삶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프랑스 노르망디 에트레타

스무 살, 파리  


이 두 단어만 두고 보면 꽤나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내 스무 살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유학 오기 전에 한국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파리에서의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의 삶은 비루했다. 파리라는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이 도시에 내가 속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파리를 제대로 쳐다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어렵게 왔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니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낭만은커녕 새벽까지 학교 과제와 시험을 붙잡고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나영아. 짐 챙겨. 우리 여행 가자."


그해 여름, 무슨 바람인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살고 있던 한국 룸메이트 친구에게 당장 떠나자고 짐을 챙기라고 했다. 지금도 친한 친구인 나영이는 놀라 하면서도 내심 반가웠던지 "어디로 가게?"라고 물었다.


"몰라. 바다 보러 가자."


어디로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었다. 그냥 어디로 가야만 할 거 같았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 하나 사 먹는 것도 수없이 생각을 했어야 했던 그때, 여행은 유학 와서 단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사치였다. 갑자기 그 사치를 부려보고 아니, 누려보고 싶었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보면 조금은 숨통이 트일 거 같았다.


우리 둘은 짐을 싸고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역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바다니까 막연히 남부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에 도착하니 역 직원은 이 역에서는 북부로 가는 기차만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바다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친절하게 보이는 프랑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북부에서도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어디로'라는 질문에 잠시 주변을 보더니 한 관광 안내 브로슈어를 집어서 건네주었다. 아름다운 해안 절벽이 있는 바다였다. "에트레타인데 여기에 가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 거야." 기차도 한 번 갈아타야 했고 또 내려서도 버스를 타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이미 마음은 동했다.


우리 둘 다 모험 아닌 모험에 신이 났다. 후앙에 들려 그날 하룻밤을 묶고, 다음 날 기차를 갈아타서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에트레타에 도착했다. 맨 먼저 관광안내소에 들려 저렴하게 묶을 수 있는 프랑스 민박집을 알아보았다. 너무 아름다운 프랑스 가정집이었다. 가족이 함께 살다 자식들이 독립하고 남은 방을 손님을 받고 있었다. 바다에 도착하자 에트레타의 상징인 코끼리 바위 해안 절벽에 반짝 거리는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다는 찰싹찰싹 거리며 하얀 자갈 해변을 넘나들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


 

ⓒ 주형원


에트레타는 모파상과 앙드레 지드 같은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모네와 쿠르베 같은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불러일으킨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다. 모파상도 이 곳을 배경으로 단편 소설을 썼고, 모리스 르블랑은 아예 이곳에 작업실을 만들고 이곳을 배경으로 괴도 뤼팽의 <기암성>을 썼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그곳에 간 우리는 작업실도 보고 기암성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셜록 홈스와 뤼팽 소설을 어린 시절 내내 끼고 살았던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서서히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을 나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났던지 산토끼처럼 쪼르르 오르기 시작했고, 나영이는 조심하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뒤에서 불안해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절벽 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해가 바다 안으로 들어간 후라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가 바람과 만나 절벽에 부딪히던 그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조심하라고 말하던 친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함께.

 

ⓒ 주형원


그다음 날 아침 바람개비를 하나 사서는 해변을 돌아다녔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걸 보면서 터질 듯이 웃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친구도 유치하다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치했다.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바로 떠난 치기도. 절벽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달려서 올라가는 치기도.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보면서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렸던 모습도.


화려하지는 않아도 유치해서 행복했다.


그 이후로도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세 번 정도 더 에트레타에 왔다. 미리 계획하고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삶에서 잠시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뤼팽의 은닉처가 있던 이곳으로 숨어 들어가듯 와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런대로 삶이 괜찮다고 여겨졌다.


가끔, 아주 가끔은 도망도 출구였다.


ⓒ 주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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