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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r 16. 2020

프랑스에서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지난 금요일, 회사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재택근무에 대비하기 위해, 집에서도 회사 서버에 원격으로 접근하여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시설이 이번 주 월요일부터 문을 닫기 때문에, 어린 자녀가 있는 직원들 역시 오늘부터 재택근무에 들어가게 된다. 나머지 직원들은 일단은 출근한다는 원칙이었지만, 어제저녁 오늘부터 전 직원을 재택근무로 전환한다는 회사 방침을 전달받았다.


지난주 금요일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기분이 이상했다. 몰려오는 무기력감과 싸우려고 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많은 일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스탠바이 상태로 변했다. 삼월 말에 잡혀있었던 칸 출장도 행사 자체가 취소되며 취소되었고, 또 조만간 예정이었던 한국 출장은 취소가 아니라 회사에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분간 출장뿐 아니라 개인 여행도 회사에 먼저 보고하고 승인받으라는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회사는 프랑스 다큐 프로덕션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국가와 공동 국제 다큐 제작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예정되었던 많은 촬영은 취소 혹은 중지되었고, 제작 역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회사에서는 경영진이 금요일 오후에 모여 또 다른 긴급회의를 했다. 이 사태가 장지적으로 지속될 경우 올해 적자가 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시뮬레이션 회의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이게 진짜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더니 어느새 소중한 수많은 생명뿐 아니라 전 세계 경제 구조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뭐가 진짜 최악이 될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회사 끝나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같은 심리 상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개인과 집단의 노력만으로 막을 수 없는 사태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불확실한 삶 앞에서.


느끼는 지독한 무기력함



게다가 중국과 한국에 이어 주변 국가인 이태리와 스페인의 위기 사태를 먼저 목격한 후 본격적으로 위기 상황에 도입하고 있어서 공포감이 더욱 심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포도 바이러스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여태까지는 일상의 모습만 얼핏 봤을 때는 크게 변한 건 없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은 한국이나 중국처럼 마스크를 쓰지 않기 때문에 눈에 덜 보였던 게 사실이었다. 이번 주부터는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뿐 아니라 약국과 슈퍼를 제외한 상점과 음식점들도 문을 닫으라는 정부 방침으로 모든 게 변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 강력하고 은밀하게 나의 일상에 침투하는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진 후 아시아인들을 대하는 서양인, 특히 내가 사는 프랑스에서의 프랑스인들의 태도이다. 중국에서 맨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졌을 때만 해도, 여러 매체에서 서양에서 아시아인 기피 혹은 혐오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었지만 사실 나는 일상에서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한국에서 괜찮냐고 물어볼 때만 해도 언론에서 과장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프랑스 감염자 수가 증가하고 옆 나라 이태리에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지난주에 마크롱 대통령이 긴급 성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인 기피 현상을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다. 차라리 모두 마스크를 쓰면 괜찮을 텐데, 아무도 마스크를 안 쓰는 나라에서 동양인을 보면 스카프로 입과 코를 막고 옷 폴라를 거의 눈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봤을 때.


지하철에 동양인이 타면 되도록 멀리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화도 나고 억울하지만 그래 어차피 모르는 이들이니 그냥 무시하자 하다가도. 거의 매일 같이 가던 단골 식당에서 거스름돈을 손에 닿지 않고 건네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려움은 이성과 별개이니까. 특히 바이러스처럼 얼굴도 없고 원인도 알기 힘든 대상에 대한 두려움은 더더욱.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끔 움츠려 들 때가 있다. 다행히 프랑스 회사 동료들은 교양 있고 좋은 사람들이라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나를 이전과 똑같이 대하지만, 회사의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가끔 '저 사람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자문할 때도 있다. 동양인으로 서양에 살며 인종차별은 물론 수없이 겪었지만, 십 년을 넘게 산 파리에서 이토록 대놓고 기피를 당한 적은 없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코로나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지하철에서 조금 험악해 보이는 흑인이나 아랍인이 옆자리에 앉으면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을 더 꼭 움켜쥐지 않았던가. 파리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절도 범죄가 흑인이나 아랍인에 의해 벌어지니 조심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아직 한 번도 당한 적 없는 나 역시 반사작용처럼 흑인이나 아랍 남성이 내 주변에 있을 때 경계하지 않았는가.


그걸 느낀 상대방의 기분은 어땠을까.



바이러스는 언젠가 지나가겠지만. 불특정 다수가 드러내 놓고 표현하는 적개심 혹은 두려움에 평생을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인류의 많은 이들은 늘 분노와 원망의 대상을 찾아왔다. 한국에 있는 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하자 친구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기도 장난 아니야. 진짜 마녀사냥이야. 걸리면 동선이랑 개인 정보 다 드러나고. 걸리고 안 걸리고를 떠나서, 확진 판명을 받으면 조직에서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기침도 함부로 못해."


우리는 도대체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끝나더라도, 우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겪었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슈퍼에서는 사재기로 인한 주요 생필품이 거의 동났고, 모든 약국들은 마스크와 젤이 없다고 문 앞에 써서 붙였다. 어쩌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한 프랑스 친구는 말했다.


"나는 지구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더 이상 이대로는 지구가 살아남을 수 없어서, 바이러스를 통해서 기존 사회와 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있는 거라고. 지구도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바이러스도 살아있는 생명체잖아. 몸이 많이 아프면 온갖 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바이러스도 죽어가는 지구의 저항의 무기라고."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황사와 폭염 등 여러 이상 신호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코로나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그로 인한 경제 시스템의 몰락과 개인과 집단의 두려움과 혐오로 인한 갈등과 분쟁으로 새롭게 인류 역사가 쓰일 수도 있겠다는. 물론 더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말이다.


남편은 아침에 투표를 하러 갔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문을 닫고 백 명 이상 모임도 금지되고 모든 주요 행사가 취소되고 식당과 상점도 영업을 중단하라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무슨 투표가 열리나 싶었다. 코로나 사태로 투표를 잠시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정부는 끝까지 지방선거 날짜를 바꾸지 않았다. 지난해 전국적인 노란 조끼 시위 이후 이번 선거에서 대패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던 마크롱 정부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참여율이 전례 없이 낮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부터도 투표하러 간다는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걱정하며 말했다.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남편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많이 안 올 테니까 나라도 가서 투표해야지. 두려움으로 아무도 오지 않고. 어차피 해봤자 바뀔 것도 없을 텐데, 안전하게 그냥 집에 있어야지. 그게 그들이 바라는 거니까." 남편의 말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어차피 다를 거 없고 앞으로도 바뀔 거 없다는 체념 혹은 절망보다는. 나부터 뭔가를 해야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런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있고.


또 그 사람이 이 불완전한 삶 한가운데 내 옆에 있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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