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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18. 2020

서점은 더 이상 내게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주말에 남편과 함께 서점에 갔다. 봉쇄로 인해 두 말 만에 가는 서점이었다. 코로나로 모든 상점들이 한 번에 들어가는 인원을 제한해서 서점 앞에는 긴 줄이 있었다. 줄을 서서 서점에 들어가기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남편과 외출을 하면 결코 빠지지 않고 들리는 장소, 서점이다. 서점에 들어가면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서적이 있는 곳으로 간다. 나는 주로 소설이 있는 곳으로 남편은 역사나 요리 분야로 간다.


그렇게 각자 책을 보고 고르다가 서로를 찾으러 간다. 서점은 넓지만 전화를 할 필요는 없다. 서로 어디에 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서점을 나오면서 꼭 서로에게 책 한 권씩 선물해 준다. 사실 같이 갔으니 함께 결제해도 되지만 책만큼은 늘 서로의 개인 용돈으로 따로 구입해서 선물해 주고는 한다. 서로 고맙다고 하며 책 한 권을 들고 풍족한 마음으로 서점에서 나오면 뿌듯하다. 돈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이다.


두 달 만에 간 서점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딱히 사고 싶었던 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늘 그렇듯 막상 오니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여러 권의 책을 집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어렸을 때부터 서점에만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어제도 몇 달 만에 서점에 가니 오랜만에 집에 돌아간 것 마냥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이 너무도 좋아, 다양한 코너들을 돌며 책을 보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나는 남편에게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선물했고, 남편은 나에게 실방 프뤼돔의 <길로부터>를 선물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 한 번 외출을 했다. 코스는 늘 똑같았다. 서점을 간 후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서점에 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코너로 흩어져서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 다시 만나곤 했었다. 동생과 나는 사고 싶은 책을 각자 딱 한 권 고를 수 있었다. 이 한 권을 고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단 사고 싶은 책이 많았고, 또 내가 사고 싶은 책은 엄마가 보기에도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책이어야만 했다.


내가 사고 싶은 책과 엄마가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책. 여기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한참 추리 소설에 빠져 있을 때라, 만약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셜록 홈스 같은 추리물을 샀겠지만 정작 파블로 곤충기 같은 책을 들고 서점을 나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혼자서도 버스를 타고 대형 서점을 갈 수 있게 되자 이 간극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을 살 돈은 없었지만, 대신 몇 시간이고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이때부터는 에세이를 즐겨 읽기 시작했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몇 시간 동안 서서 에세이를 한 권씩 읽고 돌아오고는 했었다. 삶이 시작도 하기 전에 정해진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책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행성이 있었고, 서점은 그 수많은 행성들이 모여있는 하나의 은하수였다. 서점에 들어갈 때면 늘 설렜다. 여기서 만나는 책들이 나를 진짜 운명으로 이끌어 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란 광주에는 당시 번화가가 충장로 딱 한 곳이었다. 보통 시내에 간다고 말하고는 했다. 광주 시내에는 충장서림이라는 대형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일요일 몇 시에 시내 서점 앞에서 만나자'로 늘 약속을 잡았다. 항상 조금 일찍 서점에 도착해서는 책을 들여보다가 시간이 되면 나가곤 했었다. 지난가을 오랜만에 간 광주 시내에서 충장서림이 사라지고 알라딘 중고 서점이 들어선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대학을 서울에서 다니면서 옥탑방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사라진 동네인데, 걸어서 삼십 분 이내에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었다. 대학 입학 전 올라온 서울은 춥고 외로운 곳이었다. 그 겨울 교보문고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기만 오면 쓸쓸함과 외로움이 눈처럼 사르르 녹았다.


데이트 코스로도 서점은 필수였다. 영화를 보더라도 밥을 먹더라도 늘 서점이 있었다. 희한한 게 같이 본 영화도 자주 가던 단골 식당도 한결같이 떠오르지 않는데. 함께 간 서점에서 그가 조용히 산 후 나오면서 건네던 그 책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집에 돌아와 보물처럼 소중히 열어보고는 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굉장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서점에 가는 게 좋았던 것뿐이다. 서점은 외로워도 괜찮은 장소였고, 함께여도 좋은 장소였다.


나는 그런 장소를 서점 말고는 알지 못했다.  




그런 서점에서 사 년 전 처음으로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내 첫 책이 서점에 나왔을 때였다. 영하 십 도까지 떨어진 겨울날이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나는 책이 서점에 나온 첫날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처음으로 책을 만나는 곳은 당연히 수많은 추억이 있는 광화문 교보문고여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추위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서점에 도착해서 내 책을 찾았다.


신간 매대에 놓여있는 내 책을 보고 반가움을 느끼기 무섭게, 여태껏 서점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서점에는 책이 정말 많았다. 여태까지는 나에게 늘 기쁨을 주던 그 당연한 사실이 처음으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서점을 독자로 오는 것과 저자로 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 어떤 걱정과 슬픔을 가지고 와도 위로받던 장소에서, 이제는 내 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작년에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때는 남편과 함께 서울에 있는 약 열 군데의 서점을 돌았다. 꼬박 삼 일이 걸렸다. 서점에서 내 책을 볼 때면 가슴 벅찼지만, 서점을 나갈 때는 아이를 맡기고 집을 떠나는 엄마의 심정처럼 불안하고 복잡했다. 연말에 출장으로 한국에 갔을 때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강남 교보문고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자 너무 피곤했지만, 책이 잘 있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두 권의 책을 내면서 알게 되었다. 서점에서는 우연이 없다는 것을. 서점을 지나다 눈에 띄어서 어떤 책을 열어 봤다는 것은, 그 책이 눈에 띄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야별로 잘 정리된 거 같지만, 그 뒤에는 철저한 계산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서점에 가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입구부터 광고가 시작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새로 나온 지조차 알기 힘든 책도 있다. 불행히도 후자가 다수이다.


서점은 더 이상 내게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서점이 좋다. 책 보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이 더 많이 읽힌다는 걸 알면서도. 책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서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공간에서 보냈던 수많은 외로운 시간들과 만남들. 서점에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느끼곤 했던 두근거림. 손을 뻗어 열기만 하면 엿볼 수 있었던 수많은 이들의 세계. 그런 세계에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날까 봐 소중히 넘기고 했던 책장.


서점은 여전히 내게 반짝이는 은하수다.


Image par futureprimitive de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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