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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n 29. 2020

꽃이 되어 돌아온 책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일주일 전 금요일 오후, 회사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도착했다고 뜨는데 받았어?”


“아니 지금 회사라. 집에 가보면 알겠지.”


동생은 며칠 전부터 매일 같이 한국에서 보낸 소포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이전 같으면 일주일 이내에 받아 봤겠지만, 코로나로 한국과 프랑스의 비행 편이 감소하며 몇 주 전 한국을 떠난 소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소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애정 하는 고재욱 작가님의(https://brunch.co.kr/@jw72ko) 책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작가님이 브런치에 예약 판매 소식을 알리기 무섭게, 나는 잠시 한국에 들어가 있는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 후면 마침 내 생일이었기에, 생일 선물을 물어보는 동생에게 이 책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책을 사러 교보에 갔다가 아직 책이 입고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으로 주문했으나, 인터넷 재고가 아직 부족했던지 책을 받기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동생은 독일로 돌아갔고, 엄마가 우체국에 가서 처음으로 해외 소포를 부쳤다.


하지만 소포는 몇 주 동안 대기 상태였다. 동생은 컴퓨터에 아예 창을 띄어놓고 소포가 파리행 비행기를 타자마자 알려주었다. 책이 파리에 착륙했으나 집에 오기까지는 또 며칠이 걸렸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포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선물처럼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한 장거리 여행을 위해 테이프로 꼼꼼히 봉해진 소포를 열자 그토록 기다렸던 노란색 표지가 보였다. 이북으로 훨씬 빠르고 쉽게 받아 볼 수도 있었으나, 꼭 실물로 처음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코로나로 프랑스에 꼼짝없이 발 묶인 지금, 한국에서부터 지구 반을 날아온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렇게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오랫동안 허기진 사람처럼 게 눈 감추듯 읽었고. 그러고 나니 이 좋은 책을 그렇게 읽은 게 부끄러워 매일 천천히 조금씩 음미하며 읽었으며. 또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주말에 한 번 더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치매 환자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로 7년간 일을 하며, 100명의 치매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죽음을 통해 배우는 삶의 이야기다.

 

치매 노인들의 조각난 기억들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반복되는 퍼즐 맞추기를 하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요양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그 죽음 앞에서 하찮은 삶은 없었다. - p7


저자도 한때 죽음을 생각했었다. 금융위기로 부도, 파산을 겪은 후 길에서 노숙자로 살아가던 중 마포대교 위에서 오랫동안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홈리스센터로 갔다. 그는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다른 노숙인들을 돌보았다. 그의 삶의 의지를 다잡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거리에서 목격한 죽음들이었다.


그때 거리에서 정말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가장 외롭고 차가운 죽음들을 목격하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삶의 의지를 다잡기 시작했다. - p8


죽음을 목격하며 삶을 의지를 다잡은 저자가 말하는 것은 결국 희망이었다.


지금 내게 없는 것 같은 희망도, 사실은 늘 지나다니는 길옆 한구석에 무리지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밑을 내려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작고 노란 들꽃 같은 희망을. - p9


이후 저자는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치매 환자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가 만난 이들 중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 그 자체보다 죽기까지의 과정이 두렵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죽음에 대한 마지막 태도는 다 달랐다.


죽음에 대해 겉모습만 알고 있던 사람과 죽음의 과정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의 마지막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전자가 자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두려움에 떨었다면,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때가 되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고 삶이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p20


저자는 어떻게 살아야 삶이라는 이야기의 끝인 죽음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지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만나고 돌보았던 치매 노인들의 조각난 기억을 퍼즐처럼 맞추어 복원한 후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게 과연 삶일까라는 편견이 있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만큼 아니 죽음보다 무서운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치매 환자들은 생의 가장 강렬했던 느낌과 기억을 무한 재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치매 환자의 기억법은 다소 이기적이다. 어떤 기억은 70-80년이 지나도 선명했다. 거의 100세에 가까운 노인들이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떠올렸고, 6.25 전쟁에서 죽은 오빠를 기억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그들 중에는 자녀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노인도 있었다. -p221


한 할머니는 자신을 놔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며 말한다.


처음엔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대못이 백힌 거 같았제. 아주 말도 못 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겠더라고. 가슴에 못 하나가 백히긴 했는데, 그 못이 내를 아프게 하는 기 아니고 내를 살게 하는 사랑 못이란 걸.
-p.190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생의 가장 강렬한 감정들과 기억들만 남게 될 때. 그때 남는 얼마 안 되는 기억이 사랑의 기억이라면. 그렇다면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희망이 있지 않을까.


기억을 잃어도 평생 쌓아온 삶의 태도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성격이나 습관에만 남아있는 게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나는 삶이 있는가 하면, 저자는 미소로 끝나는 삶도 보았다고 했다. 평안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는 이들처럼 웃으며 죽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태어나는 아기는 본 적이 없지만 미소 지으며 죽은 사람은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은 삶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거친 호흡이 있었고 마지막 숨을 내쉬기 위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이상한 건 그들이 죽고 난 후였다. 그들의 얼굴을 평안했다. 입가엔 미소가 남았다.
-p.244
나는 삶의 마침표를 눈물로 찍고 싶지 않다. 울음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나는 삶은 재미없다. 그러기에 나는 할 수 있는 한 오늘을 붙잡고자 노력할 것이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웃으며 죽기 위해서. -p.245
삶의 마지막이 나를 찾아올 때 기쁘게 떠날 수 있도록, 후회 없이. -p.287


p.216-217




브런치에서 고재욱 작가님을 알고 난 후 나는 매번 그의 글을 기다렸다. 기존 브런치 글과는 결이 많이 다른 그의 글은 종종 나를 울렸다. 슬픈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어떤 믿음이 생겨남을 느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읽을 때는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잠시 책을 덮고 심호흡을 했다. 세 번째 읽을 때는 눈물이 흐르게 놔두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확신했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꾼이라는 걸.


타인의 이야기를 그것도 기억을 잃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얼마나 잘 들어야 할까.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내놓기까지. 얼마나 기다리고 들어야 할까. 얼마나 깊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


딱히 바쁠릴 없는 치매 환자들의 이야기는 무척 느렸는데, 나는 그분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기다림부터 배워야 했다. 일부러 꾸밀 필요가 없는 그분들은 자신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어르신들을 보며 사람이 책이 되어 읽히는 경험을 수없이 했다. - p.137
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차근하게 전해질 때 가치 있는 이야기로 남을 것을 믿는다. 나의 삶도 그렇고, 당신의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의미 없는 삶은 없다. -p.50
말을 듣기보다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직원들은 내게 그의 말을 통역해줄 것을 자주 부탁한다. 나는 그와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p.310


그는 치매 환자들의 먹고 자는 일, 씻는 일, 입는 일, 배설하는 일을 도왔으며. 가끔은 도둑이 들었다며 경찰을 부르는 할머니에게는 경찰관이 되기도,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는 아들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었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려면 이 정도로 삶을 섞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이야기만 할 줄 알지(심지어 그것도 잘하지도 못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을 하며 또 그들의 삶을 아름다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울림이 강한 이유는 모두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고 믿는 저자의 확신과,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한 기다림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삶 그 자체였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내 마음 밭에서 자라난 씨앗도 활짝 피어나서 누군가에게 꽃씨가 되기를 -p.119


그가 돌본 치매 환자들의 삶은 이미 이 책을 통해 꽃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글은 이 책을 읽었거나 앞으로 읽게 될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에도 꽃씨가 되어 뿌려질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쓴 아름다운 책을 읽고 모두가 활짝 피어나게 되기를 기도해 본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오늘 당장 사랑하는 일, 오늘의 행복을 참지 않는 일이다. 오늘이 세상의 첫날인 것처럼 온통 나와 당신을 사랑하고,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아낌없이 행복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마음뿐이기에 -p.325


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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