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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n 22. 2020

꿈을 이뤘는데 왜 삶은 여전히 남루할까

몇 주 전 내가 네이버 인물 검색에 등록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라기도 하고 당황도 했는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가 등록되어 있는 명목이었다. 책을 두 권을 내고 번역서도 냈으니 작가로 등록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영화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로 등록이 되어있었다.


동명이인인가 해서 그 아래 정보를 보니 정말 나였다. 십 년 전 한 다큐멘터리 제작 과장을 수료하며 연출했던 단편 다큐가 쓰여 있었다. 운 좋게 처음 만들었던 단편 다큐가 한 독립 영화제에 선정이 돼서 당시 홍대 롯데 시네마에서 단 두 차례 상영을 했었다. 그렇다고 무슨 수상을 했거나 유명해진 것도 아니고 잘 만든 다큐는 더더욱 아닌데. 왜 십 년 만에 네이버에 뜨고 인물 검색에 등록되었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영화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는 그 이후 단 한 편의 다큐도 연출한 적 없는 내게는 과분한 명칭이었다. 삭제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당시 내 다큐를 보러 영화관을 찾아주었던 몇 안 되는 관객 중 한 명이었던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신기해하며 말했다. “그때 네가 다큐 피디가 되겠다고 했었는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나는 현재 프랑스 다큐 프로덕션에서 일하고 있고, 얼마 전 피디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독으로 연출을 하지는 않아도 제작을 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내가 기획한 한불 다큐가 정부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제작에 들어간다. 십 년 전 내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과 책을 쓰는 것. 그 두 가지를 결국에는 다 하고 있는 셈이었다. 말을 들은 친구는 기뻐하며 말했다.


"우와 꿈을 이뤘네"




그녀의 말은 맞았다. 십 년 전에 꿈꿨던 일들을 지금 하고 있으니 꿈을 어느 정도 이루긴 한 셈이다. 그걸 잊으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꿈을 이루면 삐까뻔쩍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상은 여전히 비루하고 삶은 남루했다. 당시에는 이 꿈들을 이루면 뭔가 근사한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 꿈을 꾸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이 말을 푸념처럼 하자 그녀는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이룬 것도 대단한 거야."


꿈을 이루면 뭔가 멋지고 근사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환상. 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 나오는 엔딩이 아니었던가. 삶은 역시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랐다. 책은 두 권 냈지만, 둘 다 잘 팔리지 못해 출판사에 늘 죄송한 마음이고. 잘릴 일 없는 공기업 정규직을 박차고 나와, 프랑스에서 가장 큰 다큐 프로덕션의 피디가 됐지만 박봉에 계약직이다.


주변에서는 시간이 가면 좋아질 거라고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이 길들은 끝까지 불확실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처럼 근사한 엔딩은 어쩌면 내게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상하게 멈추고 싶지는 않다. 아니 더 열심히 가고 싶다. 목적지가 불투명한 만큼, 이 길에 서 있는 순간들을 온전하게 즐기고 싶다. 그러면 다다르는 곳이 어디든 후회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십 년 전, 삼십 대 후반의 남자를 알았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못하면, 여기에 깊은 응어리가 맺혀서 평생 남아."


그는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고, 오직 그 꿈만을 꾸며 이십 대와 삼십 대를 보냈지만 영화감독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보며 응어리가 진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꿈이 전부인 사람이 꿈을 이루지 못하면. 잘못하면 자신에 대해 쌓여가는 자괴감만큼 세상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루지 못한 어떤 꿈들은 마음에 짙은 그을음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보면서 꿈을 이루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행위가 꿈이 돼야지. 행위에 대한 결과 혹은 보상이 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늘 대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여주는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에 입봉 한 다음 소이 말하는 잘 나가는 감독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렇다 보니 정작 그 어떤 시나리오도 시작만 하지 끝낼 수 없었다. 대작이 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 방을 꿈꾸는 그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실패를 하지 않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시도를 하지 않는 거였다. 내가 안타까운 건, 그가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게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는 그 행위들을 그가 즐기지 못한 것이다. 그 자체를

즐겼다면 적어도 좋아서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또 어떤 시나리오는 지원받아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혹시 또 모르지. 그러다 보면 정말 그가 꿈꾼 것처럼 언젠가 대박이 나서 성공한 영화감독이 됐을지도. 성공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내 영화를 하나 둘 만들다 보면 가슴에 응어리가 질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애당초 결과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베셀 작가도 돼보고 싶고, 내가 제작한 다큐가 국제 영화제들에 수상하는 쾌거도 이뤄보고 싶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건 꿈이 아닌 욕망의 영역이라는 걸


만약 이게 꿈이었다면, 진즉 결과에 실망해 포기했을 것이다. 욕망이 꼭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욕망은 많은 것들을 성취하게 하지만 종종 꿈에 대한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물론 꿈을 이뤄도 어떻게 된 셈인지 삶은 여전히 남루하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어쩌면 삶은 원래 남루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꿈은 이 남루한 삶을 껴안고 다독여주고 싶게 만든다. 그게 내가 그럼에도 꿈꾸는 것을 쉬이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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