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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n 15. 2020

선택이 없다는 말

지난해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저녁을 한 적이 있었다. 마흔 후반의 대학교수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거기서 누군가 장난으로 그 자리에 있던 중학생에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주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았다. 가상의 시나리오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선택이 없어."


시차도 적응 안 됐고 감기까지 걸리는 바람에 저녁 내내 멍 때리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확 깨서 갑자기 열을 내며 말했다.


"잘 들어. 앞으로 살면서 이런 사람 조심해. 너한테 선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이야. 잊지 마.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은 있어. 네가 선택해야 하는 거야. "


결코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가상의 시나리오에 흥분한 내 모습이 웃겼던 건지. 아니면 일정 부분 공감해서 웃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선택이 없다'라는 말에 오래전부터 깊은 알레르기를 지니고 있다.


지난주에 회사에서 상사가 일 관련해서 어쩔 수 없다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옳은 해결책이 아닌 쉬운 해결책임을. 지금 당장은 넘어갈 수 있지만 향후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사무실을 나가는 내 등 뒤에 그녀는 외쳤다.


“우리에게는 선택이 없어."


나도 모르게 또다시 흥분하고 말았다.


"아니요. 우리에게는 항상 선택이 있어요."




언제부터 이 말에 이토록 깊은 알레르기를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 선택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선택이 없다며 나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려는 이들. 아니면 선택이 없었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들.


첫 번째 부류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 등을 앞세워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기에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고.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대는 핑계라 비겁하게 느껴졌다.


두 부류라고 했지만 결국은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선택을 할 용기도 없었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은 삶은 편안하기에.


나를 정말 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이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선택할 용기가 없거나 옳은 선택을 외면하려고 할 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게 도와주었고. 나를 위한답시고 내가 원하지 않은 선택을 강요하지도. 자신의 행동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처럼 포장하지도 않았다.


아직 많은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이건 안다. 그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선택이 있다. 주어진 상황을 당장 바꿀 수는 없어도. 어떻게 행동할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들도 대부분 여태까지의 선택의 합인 경우가 다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질문을 하는 이들의 대부분에게 스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


"왜 힘든지 아세요?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래요."


살다 보면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의식적인 선택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의식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선택에 온전한 내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의식적인 선택 앞에 뒷걸음질한다. 그렇게 질질 끌다가 결국 선택을 하는 게 아닌 선택을 당하게 된다. 이때가 돼서는 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선택이 없었다고.


내심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대해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 말이 선택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당하며 살게 된다.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삶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선택은 아니 삶은 늘 우리를 기다려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인 선택이 현재 지금의 모습이고,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모습이라고 믿는다.


내가 한 선택이 설령 잘못되었더라도. 그 선택을 한 능동적인 주체가 나라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선택에 책임지고 결과에 온전히 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면. 타인의 강요에 의한 혹은 당장 눈앞의 이익이나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동적 선택이라면. 발전의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어쩔 수 없었어."


이 말을 주변 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에게 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이들은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이익이 걸린 순간 가장 먼저 남을 배신하는 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선택이 많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인생의 선택도 그만큼 늘어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사는 인생,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핑계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늘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선택을 하지 않는 안락 속에 숨어 살고 싶지는 않다.


선택받은 삶이라는 건 결국 선택하는 삶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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