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형원 Jul 06. 2020

회사에 가고 싶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이전 직장을 다닐 때는 일요일이면 월요일이 오는 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이었는데. 지금 회사에 다니고부터는 일요일이면 월요일이 기다려진다. 전 국민 강제 자가 격리 해제 후, 회사에서는 한 달 가까이 직원들의 출근을 본인 의사에 맡겼다. 대부분 자택 근무를 계속했지만, 나는 격리가 풀린 첫 주부터 출근을 했다. 두 달 동안 격리로 집에 갇혀 있던 게 지겹기도 했지만, 회사에 가는 게 좋아서였다.


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직장을 다섯 번 옮겼다. 정확히 말하면 때려치웠다. 그래도 일복은 있는지 늘 일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이었지만, 나름 빨리 적응하고 인정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만두었다. 지난 직장도 원하면 평생 다닐 수 있는 안정된 곳이었고 매달 월급을 보장했지만, 지금은 내일이라도 잘릴 수 있는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여태껏 일한 중 지금이 제일 좋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미래도 보장되지 않고 월급은 지난 직장 월급의 절반을 겨우 넘는데, 왜 회사에 가는 게 이토록 즐거울까. 물론 일이 재미있다. 다양한 주제의 국제 다큐를 제작하는 곳이라, 전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을 보고 듣는 일은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고. 이곳에서 제작한 다큐들은 내셔널 제오그래피, 아르테 등의 세계 주요 채널들에 주로 방영된다.


하지만 단지 일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지난 직장을 다닐 때 나는 거의 매일 새벽 세시에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잠들지 못하고 까만 밤을 뒤척이다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매일 같이 오늘은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출근했다.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그곳의 공기가 나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많은 직원들의 컴퓨터 화면에는 메신저가 띄어져 있었고, 매일 회사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하는 가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며 가십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최대한 일을 덜 하며 편하게 회사를 다니는 거였다. 잘릴리 없는 직장에서 더 일한다고 올라갈 곳도 없었기에. 그럴 바에는 편하게 있다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제 일이 아니에요.' 그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다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했다.


정규직이 되려면 약 일 년의 계약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그들은 다른 계약직 직원들이 정규직이 되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흠을 찾아서 회사에 알렸다. 몇몇 직원들은 이 때문에 타의로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회사에 와서 일은 안 하고 서로 돕기는커녕 왜 다른 동료를 미워하는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우리가 하루에 깨어서 보내는 시간의 적어도 절반이다. 이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삶을 이루는데, 도저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하루의 절반을 보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에 끼지 않기 위해 숱한 점심시간을 회사 옆 성당과 공원에서 홀로 보냈다. 회사에 일하러 가는 건데 분위기가 나쁘면 어떤가. 돈 벌러 다니는 거니,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지만 숨이 막혔다. 불면증이 너무 심해져 의사를 찾아가자 그는 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했다. 당시에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닌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다른 동료들을 씹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과 함께하는 안정된 직장은 쥐덫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제 일이 아니에요'라는 말로 쳐내는 수많은 일들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그만둔다고 하자 그들은 말했다.


"다른데 가면 다를 거 같아? 다 똑같아."


하지만 막상 사표를 내고도 거의 일 년 가까이 더 다녔다. 그만둔다고 하자 회사에서 계속해서 잡았기 때문이다. 내심 안정적인 직장을 결코 어리지 않는 나이에 그만두는 게 두려웠던 나는 마지못해 잡히는 척을 했다. 무서웠다. 불행한 회사 생활은 이미 적당히 익숙해졌지만, 이곳을 나가 다른 곳에 간다고 결코 행복하다는 보장도 없었고. 평생의 밥그릇이라는 요즘 보기 드문 조건의 직장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해 하반기에 대규모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퇴사하는 조건으로 '행사가 끝나면'을 내걸었다. 어느덧 그 행사의 담당자가 된 나는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일을 했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내가 속한 기관의 장은 몇 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승진을 하게 되었다.


그쯤 되자 이렇게까지 일했는데 그냥 계속 남아 있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회사에서의 내 위치는 굳건해졌고, 익숙한 불행도 견딜 만 해졌다. 아마 그렇게 그냥 다녔을 수도 있다. 승진한 상사가 언제 그만두냐고 묻지 않았다면. 승진 전에는 지금 그만두지 말라며 그렇게 사정하던 그였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 그들 덕분에 지금의 직장을 만났으니.




지금 직장은 몇 년 전 인턴을 했을 때 상사였던 그녀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육 년 전 파리의 한 다큐 프로덕션에서 만났다. 작은 프로덕션이었지만 당시 이곳에서 공동 제작한 다큐가 아카데미 올해의 최고 다큐상 및 선댄스 영화제 최고 다큐 상 등의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쓸며 주목받고 있었다. 방송 쪽 일은 해본 적 있어도 프로덕션은 처음이었고, 프랑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건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늘 고맙다고 말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덕분에 금방 회사에 적응해서 다닐 수 있었다. 규모는 콩 딱지만 한 프로덕션에서 여러 국제 장편 다큐를 제작해서 일은 늘 많았지만, 우리는 조그마한 것에도 늘 웃으며 즐겁게 일했다. 그녀를 보며 프랑스 사람들이 대강대강 일한 다고 생각했던 건 나의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디렉터였지만 음지에서 엄청난 양의 일을 거의 혼자서 해냈다.


아카데미상 수상식에 감독과 프로듀서 및 회사 대표가 참가해 상을 받고 전 세계의 스타들과 샴페인을 마실 때도, 그녀는 홀로 골방 가까운 사무실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다른 다큐 제작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점심을 사러 갈 시간도 없어서 종종 오래된 샐러드를 냉장고에서 꺼내서는 제작 중인 다큐를 체크하며 먹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도, 나에게는 시간이 되면 빨리 퇴근하라고 말하며 늘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인턴을 한 지 겨우 이주가 되었을 때 인턴 기간이 끝나면 나를 정식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녀의 말을 듣고 띌 듯이 기뻤다. 나이 서른에 새로운 분야의 인턴을 하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인턴 기간이 끝날 때쯤, 그녀가 나의 고용 계약서를 준비했을 때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관의 훨씬 안정적인 자리를 제안받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업계의 특성상 박봉에 계약직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일하게 될 텐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미래가 있기는 한 건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재고 또 재다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겉만 그럴싸한 직장을 다니면서 뼈아픈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나보다 스무 살 더 많은 그녀와는 친구로 남아 계속 연락을 이어가며 종종 얼굴을 보았다. 일로 인연은 비록 끝났지만 사람으로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 년 전 그녀는 점심을 같이 먹자며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점심을 먹으며 그녀는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지는 그녀가 잘렸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창업부터 십 년 가까이 거의 홀로 사무실에서 그 많은 일을 했는데, 대표와의 마찰로 한순간에 잘린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었기에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며 잘 될 거라고 진심으로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잘 되었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 제일 큰 다큐 프로덕션에 취직을 했으며, 지금은 잘 나가는 프로듀서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작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여전히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일단은 몇 개월짜리 계약직이었지만 나는 기쁘게 수락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건 높은 연봉이나 안정보다는 내가 하는 일과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녀와 함께 열심히 또 즐겁게 일하다 보니 어느덧 새로운 다큐를 직접 기획할 기회도 생기고 승진도 했다.


이제 이곳에서 일한 지 일 년이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녀와 비슷하다. 다 자신이 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이 있고 열심히 하며, 도움이 필요한 다른 동료를 돕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조그만 것에도 서로 고맙다고 말한다. 일이 많고 힘들어도 늘 웃는다. 내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들이 나의 거울이라면,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좋다.


물론 당장 내일 일은 알 수 없다. 회사가 어려워질 수도 있고, 계약을 갑자기 종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망할 일 없는 회사라고 해서. 조금 더 월급이 높다고 해서. 결코 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처럼 매일매일 만들어 가는 미래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잘 안 되면 또 어떤가.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 특히 직장은 더욱 그렇다. 지금 행복한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우연히 전 직장 동료를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새로운 직장 생활을 물어봤고, 나는 정말 좋다고 했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의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적당히 익숙한 불행은 전혀 알지 못하는 행복보다 편하다고. 무엇을 얻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 무엇을 잃을지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디나 다 똑같지 않다. 그건 회사가 달라서라기 보다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좋으니 회사가 좋다. 내가 보는 동료가 지금의 나고, 내가 보는 상사가 훗날 내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즐겁다. 함께 하면 힘이 나고 영감이 생긴다.


회사에 가고 싶다.



Image par Ylanite Koppens de Pixabay 



















 






































작가의 이전글 꽃이 되어 돌아온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