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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l 13. 2020

할머니의 기도빨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그것만 알아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말하곤 했다. 할머니의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은 어딘가 든든한 구석이 있었다. 말뿐이, 아니 기도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 가면 새벽 네시에 늘 알람이 울렸다. 할머니는 제일 먼저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린 후 새벽 예배에 참가하는 다른 신자들에게 모닝콜을 돌렸다. 교회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봉사를 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내가 하나님이라면 평생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봉사하는 이의 기도는 귀를 더 쫑긋 세우고 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작 나는 스무 살 이후로 교회에 거의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짝퉁 신자면서도. 한 평생을 저렇게 살아온 할머니가 나를 위해 늘 기도하니, 하나님은 당연히 내 백이 돼주시지 않을까 하는 오만방자한 자신감도 마음 한편에 없잖아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적지 않게 마주친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길 때마다,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나는 기도의 힘을 누구보다 믿는다. 물론 내 기도는 인류를 위한 기도 혹은 감사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 내 기도는 내가 필요하거나 급할 때 하나님에게 치는 SOS 메시지에 더 가깝다. 나 같으면 고까워서 모른 체할 거 같은데, 여태껏 많은 기도를 들어주신 걸 보면 하나님은 나처럼 속이 좁지 않으시거나.


할머니의 기도빨인 거 같다.




열네 살에 가출을 했었다. 삶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누군가 나에게 죽을 용기가 있으면 어디든 가서 살라고 했다. 정말로 죽을 용기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살 용기는 더더욱 없던 나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 수중에 삼만 원 정도가 있었고, 그마저 고속버스 표를 사자 사라졌다. 어차피 갈 곳이 없었기에, 그냥 막연히 바다로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도착하면 갈 곳도 없었지만, 돈도 없었다.


하지만 결연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영영 돌아가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버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흐느적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기도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녀의 기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내가 가출 중이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라는 말 대신, 내가 지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를 따라 버스를 내렸다. 그녀는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번호부를 뒤진 후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봉고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 마을 목사님이 나를 찾으러 오신 것이다. 목사님은 나를 할머니 원장님이 산속에서 홀로 운영하는 기도원으로 데리고 갔다. 한참을 꼬불꼬불한 산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그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세상 당연하게 느껴졌다. 고속버스에서 기도하는 한 아주머니를 만나고. 그녀가 나를 한 시골 마을의 목사님에게. 목사님이 나를 산속 기도원으로 안내하는 그 모든 과정이 마치 예정된 일처럼 흘러갔다. 내 인생은 거기서 한 끗 차이로 평생 어긋났을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이상하리만큼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아니 할머니의 기도를 모른 체하지 않을 거라는.




그렇게 기도원에서 할머니 원장님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곳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는 곳이었다. 할머니 원장님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꿀을 재배하며 사셨다. 가끔 목사님이나 마을 이장님 혹은 도시에 사는 여동생이 들리곤 했는데, 그 외에는 거의 홀로 계셨다. 원장님도 그렇고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나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원장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밭일을 나갔고, 나는 하루 종일 홀로 지냈다. 산을 거닐기도 했지만,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저녁은 밭에서 돌아온 원장님과 티브이를 보며 같이 먹었다. 밤에는 그녀가 내지르는 악 소리에 종종 깨곤 했다. 첫날밤은 '물러가라', ‘저리 가'라는 비명 가까운 소리를 들으며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악몽을 꿨나 싶어 물어보자, 그녀는 쇼킹한 이야기를 했다.


"밤이면 자주 악마가 나를 공격해. 어젯밤에도 한참을 악마랑 싸웠어."


갑자기 가출 소녀인 나를 무료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있는 할머니 원장님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렇다고 나에게 일체 그 어떤 종교 행위도 강요하거나 권유하지도 않았기에 사이비 교단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할머니 혼자 산속에서 밭일하고 꿀 재배하며 사시는데 교단이 되고 말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서 지낸 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날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나를 찾으러 와달라고 했다.


그녀는 가출 소녀인 나를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던 고마운 은인이었지만. 평생을 산속에서 홀로 살아온 고집 센 할머니 원장님과 피 끊는 사춘기 소녀의 동거는 결코 녹녹하지는 않았다. 나를 찾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던 할머니는 그다음 날 나를 찾으러 왔고, 나는 집으로 또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학창 시절을 거치며 가출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친구들을 보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끔 등골이 서늘하다. 당시 버스 내 옆자리에 그 아주머니가 아닌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면. 나를 데리러 온 이가 그 목사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를 데려다준 곳이 그 기도원이 아니라 잘못된 장소였다면. 인생은 사소한 우연으로 어긋나기도, 우연한 만남으로 구원받기도 했다.


그날 내 옆자리에는 천사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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