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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Nov 08. 2020

나에 대해 모든 걸 알던 친구의 단짝

"처음 형원 씨 얘기를 들은 건 십 년 전이었어요. 그때 형원 씨가 학교에서 참여한 행사가 있었는데, M이 거기 다녀온 사진을 보여주면서 형원 씨 이야기를 했거든요."


정보의 간극. 그녀가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나에 대한 정보에 비하면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건 놀라울 만큼 적었다. 아니 없었다. 그녀가 M의 고등학교 친구라는 것. M에게는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고교 동창 그룹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 일원이라는 것. M을 대학 OT 때 처음 만나고, 일 년 반 후 한국을 떠났던 나는 M의 고교 단짝 그룹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그녀를 만나기 직전에 알았다. 그전에는 ‘세네갈에 있는 내 친구'라고만 들었기 때문이다. 오 년 전 세네갈에서 일하던 그녀가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유지인 파리에서 일주일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M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파리에 있으니까 보자고 하는 거겠지. 흔쾌히 응하고 함께 저녁을 먹을 레스토랑까지 물색한 후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다.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이미 잘 아는 사람 같아요'


인사를 나눈 후 웃으며 이 말을 할 때만 해도 인사치레거니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의 상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그녀에 대해 워낙 아는 게 없어서 그랬겠지만, '내 친구의 친구'는 어느 정도 내 친구를 닮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M은 늘 헐렁하고 두꺼운 잠바를 여름에도 걸치고 몸을 꼭꼭 감추는 중성적인 차림만 고집한다.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린다.


M의 친구인 그녀는 처음 보는 나에게도 일말의 어색함 없이 대했다. 여성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생각해보면 M과 나도 남들이 봤을 때는 정반대의 성향과 취향을 지녔으니 M과 그녀가 다른 것도 당연할 수 있는데, 그녀와 M이 다른 것은 나와 M의 다름과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연결되어 있는 사람 없이 처음 만나는 이런 자리에서는 징검다리가 되는 M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화제가 돌아가기 마련인데,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그 단계를 점핑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처음 듣는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는데, 놀라운 건 내가 얘기할 때 보이는 그녀의 리액션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반응에 당황스러워졌다. 그녀가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라는 의문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고등학교 단짝인 M은 나의 십 년 단짝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십 년의 세월을 거쳐 단짝이 되었다. 우리가 아직까지 친하게 지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다르고 또 멀었다. 십 년 동안 그보다 더 활활 타올랐고 하루라도 연락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우정들이 하루아침에 작은 오해나 비수 같은 말 한마디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질 때도, 우리의 우정은 부침 없이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여기에는 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나와는 달리 이성적이고 매사에 신중한 M의 성격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런 M이기에 그녀가 나에 대해 저토록 잘 알고 있다는 게 생경했다. M은 나의 은밀한 이야기들을 무수히 알고 있었다. 집안 이야기, 연애 이야기 등등.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파리에 단기 어학연수를 왔던 M은 나와 같이 살고 있었다. 우리의 연애사를 초창기부터 결혼까지 본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조금은 겁이 났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속의 나는 어떨지, 상상만으로 아찔했다. 특히 그녀가 사뭇 신나는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때는 아찔함을 넘어 어질어질했다.


"저희는 형원 씨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어요. 저희 친구들은 비슷비슷하거든요. 그냥 별다른 일 없이 조금 심심하게 사는데, 형원 씨는 재밌는 삶을 사시는 것 같았어요."


재밌는 삶. 이십 대의 나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사는 곳도 매년 달랐고, 하는 일도 수시로 변했으며, 애인도 자주 바뀌었다. 모든 것을 살아보고 싶은 욕심에 수없이 부딪치고 깨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게 M의 친구들에게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흥미진진하게 늘어놓는 M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슬쩍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얘는 도대체 뭘 어디까지 말한 거야!'.




그녀는 그런 내 내면의 혼동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한참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M에게 들은 그대로네요."


저 말이 무슨 뜻일지 순간 복잡해졌다.


"....... 무슨 말을 들으셨는데요?"


"형원 씨가 굉장히 착하다고요"


순간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빈정거림이나 조롱의 기색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M이 그랬어요? 제가 착하다고요?"

"네. 늘 형원 씨가 착하다고 말했어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M에게 착한 친구였던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연락도 주로 M이 먼저 하는 편이고, M이 파리에 연수 왔을 때도 나는 막 시작한 남편과의 연애로 늘 바빠서 M은 자주 외로웠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면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했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었다. M은 나를 만나기 전에 늘 '뭐 먹을래'라고 물어보고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려한 여러 선택지를 보내서 내가 고르게 했다. 나는 그런 M이 얼마나 착한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M에게 나는 착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저녁을 먹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각자 서로에 대해 지닌 정보의 양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어마어마한 갭이 존재했으므로, 나는 이 갭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그녀는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었다. 그녀는 자신이 심심한 삶을 산다고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보낸 저녁 시간 동안 그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세네갈의 한 공장에 취직해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과 애인 이야기 및 엄마 이야기 등. M 때문에 알게 되고 만나게 된 우리였지만 M의 이야기를 할 틈새도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M은 나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여태 하지 않았을까. 내 이야기는 그렇게 했으면서.


이건 불공평했다.


"왜 M이 저한테 K 씨 이야기를 많이 안 해줬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K 씨를 만나기 전까지 아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건 아마 M과 형원 씨의 대화에서는 형원 씨가 주로 말을 하고, 저와 M의 대화에서는 M이 주로 말을 하는 편이라 그럴 거예요."


보기 좋게 뒤통수 한 방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M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보름에 한 번은 보이스 톡을 하곤 하는데 보통 두세 시간을 훌쩍 넘기곤 했다. 통화가 끝나면 휴대폰이 뜨거웠고 그 달궈진 폰에 바싹 붙어 있던 귀는 얼얼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최근의 대화를 환기해보았다. 정말 그 긴 수다 중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건 주로 나였다.


지분으로 따지면 대화 지분의 80퍼센트를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로 말을 하고 M은 주로 들었다. M도 얼마나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동안 그 욕구를 꾹 누르며 수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을 M을 생각하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PS. M에게


얼마 전에도 통화 끊고 보니 내 이야기만 열심히 한 것 같아 미안했어. 너는 졸린 목소리로 늦은 시간까지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지. 너한테 털어놓고 나니 잔뜩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내 이야기만 하다 끝났다는 생각에 미안했었어. 다음에는 꼭 네 이야기를 먼저 하자꾸나. 너 같은 친구를 둔 나는 행운아야. 늘 고마워.

 


@Image by Cheryl Holt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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