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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Nov 22. 2020

타이타닉을 다시 보았다

 할머니가 된 로즈가 눈에 들어왔다

1998년 2월 <타이타닉> 이 개봉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IMF 시작과 동시에 회사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으며 친구들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장사를 하셔서 해고는 없었지만, 경제가 무너지고 소비가 위축되는 가운데 장사 또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유달리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이었다. 당시 중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구제금융', '외환위기', '구조조정' 등 언론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이 단어들을 어렴풋하게만 이해했지만, 나라 전체를 감싸던 상갓집 분위기와 밤마다 부모님이 싸우며 이혼을 말한다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았다.


티브이만 틀면 아기 돌 반지, 결혼반지 등을 갖고 뛰쳐나온 시민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금 모으기와 달러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발적으로 금을 내놓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 희귀한 광경은 해외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칠 때였다. IMF는 개개인의 불행인 동시에 국가적 수치였다. 조속한 IMF 탈출만이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이때 타이타닉이 개봉했다. 개봉하기 무섭게 엄청난 흥행을 했다. 타이타닉 때문에 금 모으기가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고,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어 댔는데도 앞다퉈 영화관으로 향했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영화관이 당시 딱 한 군데 있었는데, 타이타닉이 개봉했을 때 그 영화관 앞에 줄이 얼마나 길던지 근처 골목까지 다 메울 정도였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던 암울하고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아니 삶이 고달프고 힘들수록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고




타이타닉처럼 침몰하고 있던 나라를 구하겠다고 장롱 깊이 고이고이 보관하던 금을 선뜻 내놓은 이들과 타이타닉을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몰려든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집안의 금을 긁어모아 들고 나온 이들은 늘 그렇듯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맨 먼저 나서서 희생을 자처한 이들은 IMF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우리는 절실했다. 이야기가, 그것도 아주 좋은.


그 암담한 시기에 길을 걸으면 어디서나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이 들려왔다. 개봉 당시에는 보지 못하고 시간이 조금 흘러 비디오테이프로 나왔을 때 기대에 부풀어 봤다가 다 본 후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줄거리를 너무 많이 듣고 티브이에서도 여러 번 하이라이트 장면을 본 후라 그런지 몰라도 이야기가 조금 식상했고, 잭과 로즈의 사랑 이야기도 뻔하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이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이 영화를 이십 년도 넘어 다시 보기 전까지는. 이번에 봤을 때 눈에 들어온 건 할머니가 된 로즈의 모습이었다. 평온하고 행복한 노인의 모습. 삶을 사랑하며 충만하게 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노년의 모습이었다. 영화가 이전과는 다르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사랑 덕분에 그녀는 생존할 수 있었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잭의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사랑이 그녀를 이룬 셈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던 그녀에게, 잭과 보낸 단 며칠의 시간은 그녀의 남은 생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사랑은 남아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잭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처럼 그녀는 많은 아이를 낳았고 손녀가 클 때까지 오래오래 살다 침대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는다.


@타이타닉


평온하게 잠든 채로 이 세상을 떠난 그녀의 머리맡에는 자신이 꿈꾸던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사진들이 놓여 있다.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고 싶지 않다던. 일등칸 승객들과의 저녁 식사에 초대된 잭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했던 그 말처럼 그녀는 살았다.


혹자는 잭은 죽었는데 로즈는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손녀딸까지 보고 고령의 노인이 돼서 죽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민 만약 로즈가 잭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하려던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면. 혹은 평생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랬다면 여느 로맨스와 무엇이 달랐을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불타는 사랑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게 영화에서처럼 마냥 극적이거나 로맨틱하지 않다 뿐이지 로즈와 잭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던 열정의 불씨는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한다.


그 사랑이 존재의 괘도를 바꿀 수 있었냐 물으면, 그건 다른 문제이다. 존재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랑은 살면서 여느 때나 찾아오지 않으며,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로즈처럼 용기를 내 온 존재를 던져야만 잡을 수 있는 기회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세이스트 장영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랑은 '진짜'가 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잭과의 만남 덕분에 로즈는 '진짜'가 되었고, 평생 '진짜'로 살다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잭과의 만남은 로즈에게는 '진짜'가 될 수 있는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였고, 로즈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잭은 망설이는 그녀에게 말한다.


덫을 벗어나지 않으면 죽어요.

당신은 강하니까 바로 죽진 않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당신 안의 타오르는 불은

언젠가 꺼지고 말 거예요.


할머니가 된 로즈의 눈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빛이 보였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을 평생 꺼지지 않게 하는 게,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로즈 안의 불은 그녀의 마지막 숨결까지 타올랐다. ‘진짜'일 때 우리가 가장 빛나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삶을 빛나게 한다.


주름 가득한 고령의 할머니가 된 로즈가 젊고 싱싱한 로즈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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