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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Dec 26. 2020

우리가 사랑한 시간들


To. J에게


얼마 만에 네게 쓰는 편지인지 모르겠어.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너에게 꼭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참 오랫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이렇게나마 하고 싶었어. 막상 편지를 시작하려고 하니 쑥스럽고 오랜 과거를 불러오는 것은 내가 짐작했던 그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불현듯 실감하지만 용기를 내보려고 해.


그 겨울. 12월 내내 우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메일을 주고받았어. 그때 나의 하루는 너의 메일을 기다리는 일로. 네게 온 메일을 읽고 또 읽는 일로. 너에게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쓸까 고민하던 일로. 보내기 버튼을 클릭하기 전 네게 쓴 메일을 읽고 또 읽는 일로 하루 종일 가슴 뛰고 행복했었어. 기숙사 학교에 있던 네가 나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쉬움과 설렘을 하루에 한 번씩 메일에 담아 서로에게 보내곤 했지 우리는.


하루빨리 크리스마스가 와서 너의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만을 바라며.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그렸었어. 일분일초가 더디게 흘러가던 그 깊고 깊은 겨울밤. 잠에 들 때까지 읽고 또 읽던 네게 온 메일. 매 순간 너의 생각으로 따뜻하게 채워지던 시간과 공간들. 열여덟 살의 겨울밤.


그건 첫눈처럼 왔던 첫사랑이었어


우리가 함께 보내기로 한 첫 크리스마스.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어 너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어. 밤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동이 틀 때 겨울 바다에 도착해서 일출을 보는 일박 이일의 기차 여행. 철도청에서 크리스마스를 위해 마련한 특별 이벤트였어. 단둘만 떠나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십대의 우리에게는 낭만이자 엄청난 일탈이었어.


크리스마스이브. 흰 눈으로 소복이 덮인 세상. 정동진행 밤 기차는 몹시 북적였었어. 대부분의 연인이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로 가득 찬 열차 칸에 있던 어린 연인이었어. 둘만의 공간을 찾아 우리는 이브 그 밤의 대부분을 추운 열차 통로 칸에서 속삭이며 보냈지.


춥지 않냐고 계속 묻던 너에게 나는 괜찮다고 했던 거 같아. 그 깊은 겨울밤. 크리스마스이브. 달리던 열차. 창문 밖으로 소리 없이 흩어지던 눈발. 나에게 춥지 않냐고 계속 물어보던 너의 걱정스러운 눈빛. 그 눈에 담긴 사랑.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했음에도 뚜렷해.


아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황홀감이 온몸을 감싸며 사르르 떨렸어. 온 세상이 그 순간 멈췄으면. 동시에 어떤 강렬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어. 이 모든 게 언젠가는 변할지도 모른다는. 우리가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 이 마음이. 그때까지 살면서 그토록 행복한 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두려움이 동시에 마음을 지배하고 나누던 그 하얀 밤은 우리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었어. 우리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였고. 우리가 함께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어. 그걸 직감했는지 두려움에 떨던 나와는 반대로 너는 확신하고 있었어. 우리가 앞으로 함께 할 수많은 밤과 크리스마스와 여행에 대해서.


나에게 사랑은 두려움이었고

너에게 사랑은 확신이었으니까


여행을 다녀오고 우리는 한 보름 정도 매일 도서관에서 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처음 경험해 보는 행복에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기다려졌어. 숨을 쉬는 것조차 행복하게 느껴지던 날들이었어.


하지만 나는 새해가 시작되기 무섭게 서울로 떠났어. 너는 고3이 되고 나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였지.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오면 가겠다는 너와의 약속을 무색하게 어기고 도망치듯 떠났어. 무서웠던 거 같아.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그 후에 길고 긴 기다림이. 변하게 될 우리와 우리의 마음이.

 

변한 건 우리가 아니라 나였지만 말이야


밸런타인데이. 너의 삼엄한 기숙사 학교를 야자 시간에 친구와 함께 몰래 들어갔지.  책상에 엎드려 잠든 너를 깨워 초콜릿을 준 기억도. 고개를 들어 나를 꿈처럼 보던 너의 얼굴도. 그 순간 너희 반 친구들이 지르던 함성도. 그날 저녁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던 너의 떨리는 목소리도.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너의 말도 여전히 기억해.


우리가 만날 때마다 너는 한 자 한 자 마음으로 눌러쓴 손 편지들을 건넸어. 우리는 여름에 올 내 생일을 함께 보내자고 약속했었지. 하지만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나는 변심을 했고, 변한 내 마음에 나 자신도 당황하고 미안해서 너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었어. 그 어떤 미안하다는 사과나 설명도 없이. 비겁하게 너에게서 도망을 쳤어.


다시 봄. 너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입학했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은 결국 이뤄졌지만, 캠퍼스에서 너를 마주칠 때마다 사실 힘들었어. 너를 기다리지 않고 변했던 내가 부끄럽고 미안했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는 제목의 메일을 언젠가 네가 보냈을 때도 답을 하는 대신 메일을 지웠고 얼마 후 네 옆에는 누군가가 있었어.


곧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로 떠나게 되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더 이상 너를 마주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 후로 나는 돌아가지 않았어. 여러 곳을 전전했고, 그보다 더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지. 몇 년이 지나 잠시 한국에 들렸을 때 우연히 내 소식을 들은 네가 잠깐 볼 수 있냐고 연락을 했을 때도, 너를 만나기 직전에 약속을 취소했어.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너와의 약속을 지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나는.


그리고 잊었어. 까마득히. 십 년 넘게


삼 년 전.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연휴. 꿈에 네가 나오기 전까지는. 꿈을 깨자 잊고 있던 추억들이 떠올랐어. 그 새벽 우리가 십오 년 전에 나눴던 메일들을 처음으로 다시 꺼내 읽다 여러 번 숨을 멈췄어.


'사람 맘이란 게 항상 변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깐.. 내가 바라는 건 변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야.. 물론 누난 그러겠지.. 사람 맘이 맘대로 되는 거냐고.. 물론 그렇지 않지만 맘이란 게 그러잖아.. 노력하면.. 그래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한다고.. 난 지금의 내 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믿으라는 거야.. 그게 아니면 느껴지는 그대로를 믿는 것도 좋겠지... 나도 내 마음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너와 헤어진 후 긴 길을 돌고 또 돌아 이제야 겨우 알까말까한 사랑의 진실. 사람 맘이란 항상 변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라는 걸.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믿어야 마음에도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그 진실을. 나처럼 처음 사랑을 하던 너였지만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는 정말 변하지 않은 그런 사랑을 했어. 대학에 들어가 얼마 후 네 곁에 있던 사람은 지금의 네 아내이고. 사랑스러운 딸 둘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멀리서 접할 때마다, 행복하고 또 감사해.


내가 처음 사랑한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나 또한 그 후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두려움 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에. 아직 사랑도 삶도 제대로 경험한 적 없었던 유치했지만 찬란했던 과거의 우리에게. 또 그 순간들이 만든 지금의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늦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지키지 못한 약속들. 네게 준 상처들에 오랫동안 참 많이 미안했었어.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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