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는 날개가 없다

by 주형원

바람이 온 세상을 무너뜨릴 거 같은 그런 밤이었다. 얼마 전부터 실시된 저녁 6시 통금으로 침묵에 잠긴 밤이었지만. 바람은 그런 침묵도 와장창 깨부스며 온 세상을 가차 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바람이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부딪치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쨍 소리가 들렸고. 세상이 흔들리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흔들리는듯했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가며 내쉬었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러나 명상에 집중하려 하면 할수록 바람의 포효 소리는 가까이서 들렸고. 바람이 이토록 세차게 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전속력으로 온몸을 던지는 바람과 맞서는 모든 것들은, 신음하고 있었다. 집과 거리에 세워진 차들. 길가의 표지판까지. 바람과 부딪치는 모든 것들과. 그들을 치며 지나가는 바람 또한.


많이 아플 것 같았다


따뜻한 실내에서. 은은한 조명 아래 앉아. 온 세상이 흔들리는 걸 듣고 있자니. 안전한 집 안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괴리감도 느껴졌다. 잠자고 일어나도 모든 게 그대로 있을까,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바람이 밤을 삼키고, 세상도 꿀꺽할 것 같던 그날 밤. 깊이 잠들지 못하고 새벽 내내 뒤척이다 아침을 맞이했다.


눈을 떠보니 세상은 거기 그대로 있었고. 바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




하지만 더 큰 태풍은 그때부터 몰아치기 시작했다.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송두리째 뽑아갈 듯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그 생각이 다시 또 다른 생각으로. 그렇게 일어나기 시작한 바람은 걷잡을 수없이 커지고 있었고. 곧 어마어마한 회오리바람이 되어 사정없이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재난 영화를 보면 가끔 저만치서 몰려오는 검은 회오리바람에.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배우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는 하는데. 그 검은 회오리바람이 몰려오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에 출근해 있었고. 아무도 내 안의 그런 소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는 침묵에 잠겨있었다


혹여나 내 입에서. 눈길에서. 마음을 휩쓸고 있는 이 태풍이 비집고 빠져나가. 어젯밤 바람이 그런 것처럼, 그들이 거기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치고 지나갈까 봐. 그저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온 힘을 다해 기다리는 수밖에. 평소에 기분이나 감정을 주변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편이지만. 이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이 몰려올 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침묵으로 들어가 태풍이 스스로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다만 지켜보는 것 외에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용암 물처럼 펄펄 끓으며 흘러넘쳤고. 남편과 당장이라도 멀리멀리 떠나. 평화롭고 안전하고. 남편처럼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멀리멀리 가다가도. '근대 어디?' 지금 떠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아무 곳도 없고. 도망도 갈 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설령 떠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런 세상은 결국 없을 거라는 생각에.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절망에 절망이 꼬리를 물며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영화 후크(1991) 중


"행복한 생각을 해야 날 수 있어"


얼마 전 본 영화 <후크>의 대사이다. 어릴 때 영화관에서 본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있길래 무척 반가운 마음으로 보았다. 피터팬이 어른이 된 후. 자신의 과거를 까맣게 잊고 성공한 변호사이자 아이 둘을 둔 가장이 되어 지극히 세속적인 어른으로 살던 중. 피터팬 때문에 한 손을 잃은 해적 선장 후크가 복수를 위해 그의 아이들을 납치하게 되고. 후크와 다시 맞서야 하는 어른이 된 피터팬이 과거의 자신을 되찾아가는 줄거리이다.


그가 복기해야 하는 과거의 가장 큰 능력은 나는 것이다. 과거의 피터팬은 그가 원할 때 자유자재로 날 수 있었는데. 날개도 없이 마음껏 날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만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한 가지 행복한 생각이었다. 한 가지 행복한 생각을 해야만 하늘로 붕 떠서 날 수 있다. 어린 피터팬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지만, 어른이 된 그에게는 돈을 버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간힘을 쓰며 날아오르기를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땅에 곤두박질하며 다치기만 한다. 온갖 힘을 쓰며 절망적으로 허공으로 뛰어올라 매번 떨어지는 그에게. 그의 고향인 네버랜드에 사는 한 아이는 말한다. "피터, 행복한 생각 한 가지를 해." 자식이 납치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복한 생각을 한다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행복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는 아이를 구할 수 없다.


그가 날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추락하는 모습이 왠지 익숙했다. 온갖 힘을 써야만 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과거 내 모습이기도 했다. 단지 생각만으로도 꽤 많은 걸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결국 어른 피터팬은 행복한 생각을 해서 다시 날 수 있게 되고. 후크의 손아귀로부터 아이들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나지만. 이 영화의 주연인 로빈 윌리엄스의 마지막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넘치는 감동과 행복을 선사해왔던 그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소식은 나에게도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에서 오랜만에 그를 보며 생각했다. 영화에서처럼 날고 싶을 때 행복한 생각만 할 수 있었더라도. 날아오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우리를 높이 날아오르게도.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도 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마음속 태풍도 어느덧 잠잠해졌다. 지난날 아침, 모든 걸 삼킬 것 같던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세상이 거기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태풍이 뿌리째 뽑아갈 것 같던 마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예전에는 이 태풍이 나라고 착각했었다. 주변과 나를 아프게 흔들고. 마음의 터를 황폐하게 하고 나서야 기세가 한풀 꺾이고는 했다. 이제는 태풍은 태풍일 뿐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가만히 있으면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지나간 후에도 마음은 온전히 그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생각에는 날개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각 하나로 날을 수도 추락할 수도 있는 건, 생각이 결국 모든 걸 결정하기 때문이다. 늘 나만 불행하다는 생각. 결국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을 거라는 생각. 반면, 심지어 그런 생각밖에 들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손가락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도.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도.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것도, 다 생각이라면.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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