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의 한파를 기록한 한국과 감히 비교할 바 아니겠지만, 파리도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급격히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할 만큼 온화했던 겨울이 이대로 지속되리라 믿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겨울이 정말 겨울이 될지도 몰랐다. 겨울의 매서움을 피부로 느끼던 새해 첫째 주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였다. 딱 봐도 노숙인처럼 보이는 한 남성이 지하철을 오가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출근길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의 표정과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에는 절박함을 넘어선 짙은 절망이 묻어있지만. 사람들의 지갑과 마음은 예전보다 꽁꽁 얼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해서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으니 동전 혹은 점심 티켓을 주면 감사하겠다고 말한 후 지하철 칸을 한 바퀴 돌고 지하철 문이 열리면 옆 칸으로 옮겨 가서 반복하곤 했다.
한 세 번 정도 반복했을까. 그제야 그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장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그가 단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하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그 말이 일상적이지도 당연하지도 않을 그를 보며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은 추운 겨울날이면 종종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 길가에 있는 노숙자에게 가져다주곤 한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라고 한때는 생각했다. 게다가 파리의 노숙자는 취향이 확실해서 어떨 때는 커피에 우유가 안 들어갔다고 또 어떨 때는 우유가 들어갔다고. 남편에게 가끔 면박을 주기도 했다. 노숙자 무료 식사 배급 자원봉사를 여러 번 한 감독이랑 얼마 전 대화를 하다 어쩌다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노숙인들에게 커피가 굉장히 중요해. 어쩌면 밥보다도 더. 자원봉사할 때 커피 당번일 때가 제일 어려웠었어. 식사는 다들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잘 지켜서 먹고 끝나는데, 커피는 난리가 아니야. 무슨 커피로 달라. 먼저 달라. 계속 와서 리필해 달라. 밥보다 늘 요구 사항이 많았어.”
"그래요?"
"응 그렇다니까. 밥은 생존이라면 커피는 뭔가 그 이상처럼 보였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그 제스처 자체가. 본인들을 사람답게 만드는 어떤 행위라고 느끼는 거 같아 보였어. 내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습관처럼 하루에 서너 잔을 기본으로 마시곤 하는 커피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니. 그걸 알고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꾸준히 커피 봉사를 실천하는 남편이 갑자기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나는 황급히 동전 주머니 지퍼를 열었지만, 애꿎게도 재작년 한국에서 썼던 백 원 오백 원짜리. 당장 쓸모없는 동전들만 있었다. 아 안타깝지만 도울 수 없나 보다. 내심 이 지하철 칸의 누군가가 그런 나 대신 도움을 주기를 기대하며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들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보며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건 평상시 내 모습이기도 했다.
거창한 소원도 아니고 단지 따뜻한 커피 한 잔. 누군가의 이런 작지만 절박한 소원도 못 들어준다면. 그때 반짝 불빛이 들어왔다. 점심 티켓! 그렇다 나에게는 회사에서 매달 주는. 고용주와 고용원이 반반씩 비용을 분담하는 점심 티켓이 있었다. 이 티켓만 있으면 그가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 끼와 함께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하철을 나가고 문이 닫히려는 찰나 잠깐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 뛰쳐나갔다.
"저기요!!!"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자기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부르냐,라는 얼굴이었다.
"제가 동전은 없는데. 점심 티켓이 있으니 드릴게요."
그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한 나 자신을 더없이 기특해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어 점심 티켓 책을 넘기는데. 아아 이런. 남은 티켓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이럴 리 없을 거야. 분명 다 쓰지 않았을 텐데.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다시 한번 차분히 넘겼지만. 티켓은 모두 사라진채 광고만 남은 빈 껍데기였다. 아 이건 분명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 거였다.
고개를 돌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불현듯 떠올랐다. 오늘 아침 지갑에서 본 20유로짜리 지폐가. 평소에 현금을 미리 뽑아놓는 걸 늘 깜빡해서 현금이 필요할 때마다 곤경을 겪는 일이 다반사인데. 오늘 아침 지갑을 열었더니 무려 20유로짜리 지폐가 떡하니 들어있는 것이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었었다. 내가 뽑은 내 돈일 텐데. 예상치 못하게 발견하니 꽁 돈이라도 생긴 양 괜히 신이 났다.
20유로. 3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아주 큰돈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쓸 때 여러 번 고민하는. 이보다 더 큰 금액도 몇 번 마음먹고 기부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지금 이 시점에서 건네기엔 한없이 커 보였다. 그 몇 초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찾아보니까 없다며. 정말 미안하다며 그를 돌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내 수중에 있는 이 지폐를 줄 것인가.
출근 중이었고 그의 눈길이 느껴져서 고민할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길게 느껴졌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을 그의 마음은 어떨까. 그는 분명 내가 점심 티켓이 없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동전도 없다고 했어서, 아마 체념을 시작했을 것이다. 정작 돕기는커녕 실망만 안겨주고 끝나는 꼴이 되는 셈이었다. 그는 이미 익숙하지 않을까. 아니 체념에 익숙한 그에게 다시 체념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와 지폐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처음으로 흔들리던 그의 시선이 고정되며 마스크로 가려진 내 얼굴을 잠깐이지만 찬찬히 들여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게 'Bonne année (좋은 한 해 보내세요)'라고 웃으며 말하고는 등을 돌려 서서히 멀어졌다. 저 하늘의 누군가가 잠시 나를 시험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가진 걸 기꺼이 내줄 수 있는가
이게 만약 시험이라면. 아무리 후하게 쳐도 반만 통과했다고 생각했다. 지폐를 건네기까지 채 일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분명 주지 않아도 되는 핑계와 계산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정작 현금이 필요할 때는 매번 텅텅 비어있던 지갑에 웬일로 현금이 있더라니,라는 원망도 잠깐 했으니까. 아까웠으니까. 하지만 다시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하면서, 그냥 알았다. 그 돈은 그에게 건네기 위해 오늘 거기 있었다는 걸.
새해 첫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