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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pr 28. 2018

사월의 숲

겨울은 이제 다 지나갔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지난 주는 여름 같은 사월의 날씨가 지속되었다. 계절로 보자면 엄연히 아직 봄이었지만 파리의 온도는 27-28도를 웃돌면서 봄보다는 여름에 더 가까웠다.


덕분에 불과 일이 주 전까지만 해도 겨울 외투를 입었는데, 부랴부랴 침대 아래 상자에 고히 모셔놓았던 여름옷을 찾아 꺼내 입어야 했다.  

 

겨우내 칙칙한 파리의 회색 하늘과 몇십 년 만의 폭설까지 겪은 파리지앵들에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사월의 여름은 말 그대로 축복이었다.


금요일 오후 퇴근 후 센느 강 주변을 산책하는데 여태껏 이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파리 토박이인 장뤽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세느 강변에서 보는 건 처음이야”

 

모두들 센느 강변에 걸터앉아 회사나 학교가 끝나자마자 사들고 온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초여름 저녁의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축제보다 더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모두들 어딘가 모르게 들떠있었다.


어쩌면 다음 주면 또다시 온도가 십도 이상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 만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축제를 그토록 즐기는 것이 축제가 곧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것처럼.  


몇 개월 만에 돌아온 햇살이 비추는 파리는 아름다웠고,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에 산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내게는 주말에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숲이었다.


공원은 많지만 산과 숲은 거의 없는 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퐁텐블로 숲이 있는데, 이곳은 몇 년째 나에게 비상 출입구와도 같았다.


더 이상 일상을 버텨낼 자신이 없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난 퐁텐블로 숲으로 향했다. 이곳에 와서 하루 종일 천천히 걸으며 나무 그늘 아래서 피크닉도 하고 낮잠도 잤다.  


그러고 나면 계속 쑤시고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물렁물렁 해지는 것 같았고, 도시에 살고 일하면서 상실한 나의 어떤 일부를 다시 찾아 끼우는 느낌이었다.


자연의 힘은 위대해서 다시 나 자신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게 해주었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숲을 나올 때면 늘 내 마음에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숲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숲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웃을 차례차례 벗고 다시 입었으며,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반복됨을 나는 내 일상이 아닌 숲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의미에서 4월의 숲은 특별했다. 봄과 가을처럼 변화하는 단계의 숲은 여러 계절을 동시에 품고 있었지만 가을 숲이 살아나기 위해 죽는 과정이라면 봄의 숲은 죽음 위에서 다시 살아나는 법을 보여주였다.


죽은 잎새 위에 자라나는 나무의 새싹과, 아직 다 떨어지지 못한 회색 입새 옆에 솟아나는 푸르른 입새는 죽음과 삶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이번 주말에는 거의 모든 주말에 근무를 하는 요리사 남편이 오래간만에 쉬는 주말이었다. 유럽 다른 국가로 주말 여행을 갈까 고민하다가, 떠나지 않고 이틀 연속  숲에 와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토록 우리 둘 다 함께 숲을 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주중에 근무를 하는 나와 주말 대신 주중에 이틀을 쉬는 남편이 함께 숲을 갈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해서 멀리 어딘가를 가기 보다는 충분히 그리고 천천히 숲을 즐기기로 했다.



이틀 동안 아침에 남편이 피크닉 준비를 끝내면 우리는 동네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기차를 타고 퐁텐블로 숲으로 향했다. 숲 입구에 오후 초반에 도착하면 우리는 숲을 음미하며 하루 종일 천천히 걸었다. 중간에 싸온 피크닉을 먹었고, 또 걷다 지치면 잠시 나무 아래서 낮잠도 잤다. 그리고 초저녁까지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내내 숲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퐁텐블로 역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숲에서 보낸 이 주말이 행복 그 자체였다.



나무들은 아직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날씨 때문인지 숲은 벌써 여름의 향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하루 종일 숲의 속살을 거닐었다.


최근에 관계로 인해 크게 마음 상할 일이 있어서 힘들었는데, 이틀을 숲에서 보내니 점차 상처에 새살이 돋듯 다친 마음에도 새살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죽은 잎새 위에 나는 새싹처럼, 마음에도 조금씩 다시금 희망이 솟아낫다.


나는 어쩌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 괜찮을 거라고, 아니 다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으며 웃고 말하기도 하고, 그 보다 더 자주 홀로 앞뒤로 조용히 걸었다. 이미 함께 여러 번 걸었던 산티아고 길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힘들 때 갈 수 있는 숲이 있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숲에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두 축복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온도가 십도 가까이 떨어지고 나는 또다시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하겠지만, 이틀 동안 사월의 숲에서 미리 맡은 여름의 향기는 나로 하여금 이 봄 내내 꿈꾸게 할 것이다.

 

겨울은 이제 다 지나갔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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