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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02. 2018

슬퍼 보여요

타인의 슬픔을 읽는다는 것

오늘 오전 회사에서 한 분이 인사를 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말없이 가시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잡고 물어보았다.  

“아니 왜 그렇게 저를 보고 깜짝 놀라셨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오늘 너무 슬퍼 보여서요.”

"마치 오늘 아침에 울고 온 듯한 얼굴이어서 놀랐어요."

우리가 평소 얼굴만 보고도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그녀의 슬퍼 보인다는 말에 한편으로는 놀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살다 보면 가끔은 마음이 짊어지기에 힘들 정도로 슬플 때가 종종 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하필 그럴 때 누군가 의도치 않고 건네는 '얼굴 좋아 보여요'라는 말은 늘 가시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그건 내가 그만큼 내 깊은 감정을 잘 감추며 산다는 뜻도 됐었고, 또 어쩌면 내 앞의 상대방이 그만큼 내 진짜 마음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기쁠 때는 기뻐 보여야 하고 슬플 때는 슬퍼 보여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본래 워낙 웃는 걸 좋아하고, 재미있는 걸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평소에 그 누구보다 많이 웃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잘 웃는다고 해서 그만큼 덜 슬프다는 것도, 힘든 순간이 적다는 의미도 결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힘든 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웃으려고 했다는 게 맞을 거 같다.


웃는 그 순간만큼은 마치 참았던 숨을 내쉬듯, 막혀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뚫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눈으로만 그리고 입으로만 웃지 않고 온몸으로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몸을 흔들며 웃고 나면 아무리 무겁던 마음도 잠시나마 가벼워졌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웃고 있어도 가끔은 슬픔이라는 깊은 바다 안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헤엄치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은밀히 바랬는지 모른다.


자주 웃는 얼굴이다 보니 얼굴에 슬픔이나 피로 혹은 짜증이나 분노가 곁들게 되면 대부분 ‘얼굴이 안 좋네’라고만 말했지, 그걸 넘어서 보려고 했던 이들은 얼마 없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는 게 더 맞을 거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웃음 뒤의 슬픔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오늘 너무 슬퍼 보인다는 그녀의 말이 그렇게 고마웠을지 모르겠다. 난 정말 밤새 한 잠도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으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슬픔을 들켰을 때. 읽히지 않으려고 꼭 닫아 놓은 책 같은 내 마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열려서 읽혔을 때.


난 예기치 못한 위안을 받았다


어쩌면 슬픔은 그 형체 자체로 알아봐 주는 눈길 아래서는 햇살 아래서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사람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슬픔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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