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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r 17. 2019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충돌 - 영화 <그린 북>

좋은 영화를 보거나 좋은 책을 읽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나면 영혼이 물렁물렁 해졌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평소에는 마음이 아스팔트처럼 딱딱히 굳어 있어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다가 이런 영화나, 책이나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는 영혼이 이제 오븐에서 막 구워져 나온 따뜻하고 쫀득한 빵처럼 물렁물렁한 상태로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곧 식어서 딱딱해지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들이 있기에 마음이 다시 덥혀질 수 있다.


얼마 전에 본 <그린 북>이 내게는 그런 영화였다. 단지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를 넘어서 이 영화 덕분에 오랜만에 찐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마 이야기가 실화에 바탕하고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시나리오를 쓰라고 해도 쓰기 힘들 텐데, 이런 영화나 책을 보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소재들은 다 실제 삶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상 깊은 사건이 일어날 때 '영화 같은 일'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영화를 제작한 사람이 실제 주인공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언젠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니, 단지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삶 외에도 제작자의 인생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미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은 저 세상에 있지만,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아들을 통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아니라 아름다운 두 사람의 우정을 목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아한 천재 피아니스트와 반 건달(?) 주먹 운전자와의 8주 간의 미국 남부 투어. 처음에는 이 영화가  모든 면에서 다른 두 사람이 연주 콘서트 투어라는 기회로 함께 여행을 떠나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대한 코믹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감독도 피터 패럴리 감독으로 이 영화 전에는 코믹 영화만 연출했던 감독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서로 전혀 다른 타인이 만나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가에 대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자,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기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다.


60년대 미국, 극심한 인종차별주의로 흑인은 사회 하위 계급이라는 인식이 팽배할 때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인종차별이 미국에서 제일 심해서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미국 남부 투어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을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보디가드 겸 운전자를 뽑기 위한 면접을 보는데, 여기에 클럽의 문지기로 일을 하고 있다가 클럽이 잠시 휴업하는 바람에 휴직 상태에 처한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 발레롱가가 지원을 하게 된다.


돈 셜리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심리학 박사이자 여러 국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말 그대로 교양으로 넘치는 우아한 예술가이다. 또한, 당시 60년대에 흑인으로서 받는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천재성을 인정받아 성공한 몇 안 되는 케이스이며, 백인 상류 사회의 최고층 인맥도 지니고 있다. 이런 돈 셜리 앞에 클럽에서 주먹질과 허풍을 일삼는 건달만 아니었지 거의 반 건달의 삶을 사는 토니 발레롱가가 나타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인 면접 장면


이런 배경을 전혀 몰라도,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만 봐도 누구든 알 수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고, 극과 극이며 결코 친해지기 어려운 두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돈 셜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면접을 보러 와서도 자기 성격대로인 토니를 뽑는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그의 표정에는 후회와 짜증이 역력하다. 토니는 운전을 하면서 끊임없이 먹고 마시며 심지어 담배까지 연달아 뿜어대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쉴세 없이 이야기를 한다.


"담배 좀 버려 주시겠습니까?"

"왜요?"

"숨을 못 쉬겠어요"

"담배가 들어가야 제가 일을 할 수 있는데요"


셜리는 단호하게 그러나 교양 있게 잘라서 말한다.


"고마워요"


이런 식의 대화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처음부터 코드가 맞지 않던 둘의 관계는 결코 순조로워 보이지 않는다.

셜리 박사는 토니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사건건 지적을 하고, 토니도 거기에 질세라 꼬박꼬박 대꾸를 한다. 셜리 박사의 눈으로는 아무런 교양과 상식도 없이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토니가 한심해 보이고, 토니에게는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셜리 박사가 천하에 재수 없는 놈으로 보인다.



서로의 삶에서는 결코 만날 일 없는 종류의 타인과 함께 장기 로드 여행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토니는 단순해 보여도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조금 더 사람들이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 바꿔서 소개하겠다는 셜리 박사의 제안을 그는 단박에 거절한다. 자신의 말투와 억양까지 상류 사회의 사람들에게 적합하게 사용하고 비속어를 자제하라는 부탁에도 바로 항의를 한다.


"왜 사사건건 시비요?"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맞는 사람도 틀린 사람도 없다. 다만 서로의 성격이 다르고 살아오면서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만 다를 뿐이다. 인종차별에 맞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남부 투어를 하면서도 셜리 박사는 백인 엘리트 계층과의 친분을 중요시 여긴다. 다른 흑인 뮤지션의 음악을 듣지 않고 흑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천재성을 인정받고 성공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운 천재를 초반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토니는 외친다.


"이봐요 박사. 이 사람들은 모두 당신 같은 사람들이에요"



여행이 진행되면서 토니는 셜리 박사가 얼마나 고독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인종차별에 물러서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교양 있고 단호하게 대항하는 셜리 박사를 보면서 앞으로는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지만, 뒤로는 가슴 아파하며 그 역시 자신의 방법으로 그를 도우려 한다. 셜리 박사 역시 토니가 거친 말투와 행동 그리고 허풍과 변칙을 일삼아도 알고 보면 정이 많고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신사라는 것을 깨달아가게 된다.



그린 북이라는 영화 제목은 실제로 그 시기에 있었던 흑인 여행 전용 가이드북에서 따왔으며, 영화에도 이 가이드 북은 등장을 한다. 이 가이드 북은 흑인 빅터 휴고 그린에 의해 제작되었고 우편배달부이자 여행작가인 그는 그 당시 흑인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숙박 시설, 레스토랑, 주유소 등의 정보를 가이드북에 상세히 기재하여 흑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런 목적의 책이 30년 가까이 인기였고 꾸준히 팔렸다는 것만 봐도 그 당시 얼마나 인종 차별이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식으로 지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당시 흑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 북 <그린 북>


돈 셜리도 무대 위에서는 백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주인공이지만 막상 무대를 벗어나면 흑인이라는 사회적 카테고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엄청난 차별과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 힘없는 개인일 뿐이다. 토니의 주먹과 변칙은 셜리 박사가 남부 투어를 하면서 겪는 여러 고비를 넘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 최고의 피아노만 고집하는 박사를 위해 연주 전에 미리 가서 체크하는데, 계약에 적힌 피아노가 아니어서 항의하자 그냥 아무거나 가지고 하라는 극장 관리자에게 주먹을 날리고, 경찰에게는 양복 사 입으라면서 슬쩍 돈을 건네주기도 한다.


돈 셜리의 콘서트 장면 - 영화 <그린 북> 중에서

거리에 쓰레기도 못 버리게 하는 돈 셜리는 이런 토니의 행동에 항의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거나 말을 들을 토니가 아니다. 서로의 의견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을지라도, 이 만남을 통해 이들의 세계는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 둘은 죽을 때까지 삼십 년이 넘게 이 우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돈 셜리는 토니의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것을 허락했으나, 자신이 죽은 후에라는 단서를 붙여서 영화는 2013년 그의 사망 이후에 제작되게 된다. 영화가 개봉되고 토니의 아들은 말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그 시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어떤 만남은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 영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본 후에 느꼈던 이 따뜻한 행복감은 오랫동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 맺음'이 점점 필수가 아닌 피해야 할 일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나와 다른 타인과의 만남과 그 과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장 인간답고 가장 진실된 행복이 스크린을 넘어 마음으로 들어오는 영화였다.


영화 <그린 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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