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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an 28. 2018

떠나보낸다는 것

삶의 만남과 이별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는 종종 결혼 축하 감사 메일이나 모친상 및 부친상 조의 감사 단체 메일을 받는다. 본사는 한국에 있지만 전 세계에 사무실이 있어 다들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나는 여기서 근무한 지 이제 겨우 일 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그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슬픈 순간에 느낀 심정을 몇 줄의 글로써 받아 본다는 게 어색하고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온 편지를 열어보는 거 같았고,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거 같아서 처음에는 읽지 않고 있다가, 언젠가 우연히 한 번 열어서 읽어보고는 이제는 올 때마다 매번 읽고 있다. 매번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느끼고 있을 설렘과 감추려고 해도 글에서 절로 묻어 나오는 행복함 및 결의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기도 하고, 누군가가 느꼈을 그 엄청난 질량의 슬픔과 상실감 및 고인에 대한 회상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물론 회사에서, 그것도 잘 아는 동료들 뿐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영영 모를 가능성이 더 큰 직원들에게까지 보내는 메일이라 아무리 큰 기쁨과 슬픔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관습적으로 내려온 일정한 형식의 틀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대부분 비슷한 문구의 축하와 조의에 대한 감사 인사에서 시작해, 짤막이 열 줄 이내로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을 쓴 후,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고 글로 인사드리는 것에 대한 양해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제 막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신혼의 단꿈과 일상생활로의 복귀로 정신없을 때, 혹은 이제 막 상을 치르고 경황없이 한참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사람한테까지 이런 글을 써서 보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조직이 워낙 크고 전 세계에 사무실이 있다 보니 업무에 관련이 있는 부서끼리만 우선적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회사라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낼 일도, 받을 일도 평소에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적어도 컴퓨터 앞에 앉아 첫 자를 두드리기 시작하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글의 힘이 강한 게, 단체 메일의 형식을 빌린 이런 절제된 짧은 글에서도 각자의 심경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이 비록 그들이 느끼는 행복과 설렘 혹은 고통과 상실이라는 엄청나게 큰 빙산의 아주 작은 일부일 지라도 말이다. 단지 몇 줄이지만 그들의 입장에 나를 놓게 만들고, 한 번도 모르는 이에게 마음속으로 축하를 건네기도 하고 작은 위로의 말을 건네게도 만든다.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답장으로 전할 용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결혼의 경우 결혼 당사가가 쓴 메일도 있지만, 자녀가 결혼을 하여 축하 감사 메일을 쓴 메일도 종종 왔다. 나에게는 신혼 단꿈에 젖어있는 새 신랑, 새 신부의 감사 메일보다는 오히려 자식을 보내는 부모가 쓴 글이 울림이 더욱 컸는데, 짧은 단락이지만 자녀를 결혼시키고 떠나보냄에 대한 섭섭함과 기쁨 등의 만감이 느껴져서다. 


'아직 어린애로만 여겼는데 배우자를 만나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결혼식 때 다들 많이 운다고들 하여 걱정을 했었는데 눈물 흘리지 않고 기쁜 마음을 잘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딸을 결혼시키고 보니 장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어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자녀가 독립을 하고, 사랑과 행복의 가정을 세워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쁨이 더 커짐을 느낍니다.'

 

'주례의 인도하에 신랑 신부가 저와 집사람에게 인사할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어떤 때는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의 메일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의 메일과 우연히 한 날에 올 때도 있었는데 이럴 때는 여러 가지 느낌이 교차했다. 둘 다 자식을 그리고 부모를 떠나보낸 후의 메일이었지만, 한 떠나보냄은 새로운 가정이라는 또 다른 만남의 결실로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떠나보냄은 적어도 이 생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을 의미했다. 그러기에 한 떠남은 섭섭함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었지만, 다른 떠남은 조금 더 부모님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가 조금 더 가족 곁에 계셔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심장이 원래 안 좋으신 데다가 지난해 가을 쓰러지신 후 끝내 회복하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늘 가족만을 걱정하셨고, 이제야 모든 자녀들이 자리를 잡고, 마음을 놓으실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있어주었으면 하는.. 그건 떠나보내야 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을까? 아직까지는 떠날 줄만 알았지, 떠나보낸 경험은 삶에서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 며칠에 한 번씩 받는 이들의 메일은 만남과 이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 그건 어쩌면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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