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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r 29. 2019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 헬렌 켈러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만일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보고 싶은가 상상해 봅니다. 내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동안 당신도 앞으로 단 사흘만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셋째 날 어둠이 내릴 때, 이제 다시는 빛이 비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면 이 소중한 사흘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 헬렌 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중-




얼마 전에 우연히 오디오북으로 헬렌 켈러의 에세이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를 듣게 되었다.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부엌에서 봄이 찾아오는 숲으로 오랜만에 피크닉을 가기 위해 김밥 재료를 준비하면서 듣기 시작했는데, 오디오북의 특성상 작가가 내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이 에세이에서 만약 기적적으로 눈이 떠져 자신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빛의 시간 동안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가 이 글을 쓸 때는 53세였다. 이미 평생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온 그녀는 남은 평생도, 삼 년도 아닌 딱 삼일을 볼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 글을 시작한다. 


현실에서는 우리 대부분에게는 평생 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각'이라는 선물이 그녀에게는 야속하게도 삼일이 아니라 세 시간 아니 삼 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헬렌 켈러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그녀의 글이 단지 보지 못한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소망으로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녀의 글은 볼 수 있음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글이다. 



우리는 어느 날엔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대체로 그날이 먼 미래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건강할 때 죽음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들을 하고 삶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무관심한 태도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 
시각이나 청각이 손상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축복받은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합니다.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풍경과 소리를 흐릿하게 받아들입니다.
무엇이든 잃어버리기 전에는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는, 아프기 전에는 건강의 중요함을 알지 못한다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 헬렌 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중


그녀는 죽음을 언급하며 우리가 건강할 때는 죽음을 상상하지 못하기에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며, 시각 또한 잃어 본 적 없기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녀는 흔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이건 그녀만이 할 수 있으며, 그녀의 모든 삶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행복과 고통이 들어가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최근에도 친한 친구 하나가 숲 속으로 긴 산책을 하다가 나를 찾아왔기에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었어" 
한 시간이나 숲 속을 걷고서도 특별히 관심 가질 것을 찾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보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을 수백 가지나 찾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 헬렌 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중


그다음 날 숲으로 산책을 가기 위해 김밥 재료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나와 남편은 숲에 갈 때마다 반나절씩 머물고 오고는 한다. 몇 시간씩 걷고, 싸온 점심을 먹고, 오래된 나무들 아래서 책을 읽다 사르르 낮잠에 들기도 한다. 숲을 거닐며 늘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면 나 또한 아마도 헬렌 켈러의 친구와 같은 답변을 하지 않을까. 반나절이나 숲에서 보내는데도 말이다. 

내게는 그녀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이 매 시 매 초 일어나고 있는데도 나는 보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녀는 시각을 찾게 된다면 맨 처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저는 당연하게도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보내는 동안 내게 너무 소중해진 것들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그 후로 다가올 어둠 속으로 그 기억을 가져가고 싶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이 영혼의 창이라는 눈으로 친구의 마음을 보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며, 우리에게 역으로 묻는다.

 

'눈으로 본다고 해서 친구나 지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혹시 당신은 그저 무심하게 친구를 쳐다보지는 않나요?' 


그녀는 시각을 찾게 된다면 친구들을 모두 불러서 얼굴을 오래 들여보고,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 증거'를 마음에 각인시키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숲으로 산책을 가고, 그다음 날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을 목격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가서 세계의 역사와 예술 작품을 보고 연극 공연을 감상하겠다고 했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마지막 날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보고 싶다고 했다. 왜 인생에 딱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토록 소중한 시간의 마지막 날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삶을 보는데 쓰고 싶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왜 그리고 무엇을 보고 싶다고 하는지를 말하는 순간 저절로 손이 멈추며 마음에 무언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먼저 분주한 교차로에 서서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미소를 보면 행복할 것입니다. 결정을 내린 진지한 표정을 보면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고통을 보면 동정할 것입니다. (...) 내 눈은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슬퍼 보이는 사람에게도 열려있습니다. 

분주한 교차로에서 수도 없이 떠 있었을 나의 눈은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려고 한 적이 있을까.  빨리빨리 바뀌지 않은 신호등,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 멈추지 않는 차를 단지 짜증이 깃든 눈으로 노려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일상에서도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미소, 진지함, 고통 등을 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내 눈은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슬퍼 보이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눈' 보다는 '무심한 눈'이 더 맞는 거 같다. 

'자정이 되면 잠시 뜨였던 내 눈은 다시 감기고, 영원한 밤이 찾아오겠죠. 고작 사흘 동안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는 없겠죠. 어둠이 다시 내려앉은 뒤에야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멋진 기억이 가득하니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이 글을 들으면서 나는 헬렌 켈러가 시각을 지닌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이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이 글 덕분에 나 역시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삼일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볼 것인가도 상상해 보았다. 이 상상만으로도 내 책상 앞 벽에 늘 붙어 있는 추억의 사진들이 눈에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당신에게 그런 운명이 닥치게 된다면 당신의 눈은 이전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다가올 긴 밤을 위해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둘 겁니다. 당신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눈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본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것 모두를 어루만지고 끌어안게 될 겁니다. 마침내 당신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고, 아름다운 세상이 새롭게 앞에 열릴 것입니다. 


- 헬렌 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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