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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23. 2019

03. 달콤한 아바나의 첫날밤

아바나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제 정말 쿠바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항을 알아봐서가 아니라 쿠바에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후각이 유난히 둔해서 상한 음식도 종종 실수로 먹곤 하는 내가 냄새로 가장 먼저 쿠바를 기억해낸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오 년 전 쿠바 전역을 여행할 때 뭐라고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든 냄새가 쿠바 곳곳에 배겨져 있었다. 오래된 배기가스 냄새였는데, 탁하면서도 강렬하고 중독성이 있었다. 길에 워낙에 오래된 올드카와 버스가 다니고 있어서 여기서 배출되는 걸 수도 있는데, 산티아고처럼 수많은 오토바이가 도심 한복판을 헤집고 다니는 곳은 더 했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 그곳의 ‘옛날’ 내음이었다.


향기롭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정겨운 데가 있는 이 추억의 냄새는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내 코를 찔렀다. 동시에 속에서 뭔가가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잊고 지내던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지난 쿠바 여행의 강렬한 기억들이 순식간에 자동으로 소환되었고, 엄마는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신기해하면서 말했다.


“갑자기 얼굴이 다 살아났네”


이번에는 유달리 힘든 여정이었다. 파리에서부터 10시간이 넘는 장시간 비행 내내 이유 모를 심한 두통으로 한참을 시달리고 진통제로 간신히 버텼다. 비행이 아닌 고행으로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 내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바나 공항에 들어오자, 눈 깜짝할 사이에 두통과 피곤함이 사라지고 가슴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을 입고 있는 공항 여자 검색원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했다.


“세상에! 저렇게 섹시하게 있어도 되는 거야"

“엄마, 여기는 여자 경찰들도 다 저렇게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 신고 있어”

“진짜 신기하다. 봐봐 저 아가씨 너무 매력적이다. 이제 진짜 쿠바에 온 거 같다”


섹시한 국가. 쿠바는 단연코 내가 아는 모든 국가 중에서 제일 섹시했다.


유혹이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국가. 사랑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국가. 그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제약 속에 살면서도 유혹과 사랑, 이 두 가지만은 어떠한 제약도 금기도 두지 않는 나라. 그래서 알면서도 빠지고 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쿠바였다.


이런 곳에서는 경찰이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있어도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이상하게 보는 게 더 이상한 곳이었다.


쿠바의 여자 경찰 ⓒ 주형원


짐이 나올 때까지는 한참이 걸렸고, 우리는 짐을 찾아 환전을 하고 택시를 잡아타서 5년 전 내가 쿠바에 맨 처음 도착해서 머물렀던 수라마의 민박집으로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바나는 낮에는 타는 듯한 햇살로 찬란하게 빛났었고, 밤에는 듬성듬성 켜진 몇 개의 등불만이 도시가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는 생각보다 많은 불빛들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기억과 눈앞의 광경, 그 간극 사이에서 잠시 헷갈렸다.


ⓒ 주형원


“엄마 여기가 말레콘이야”

“드라마에서 송혜교랑 박보검 나온 데 아니야? 방파제가 쭉 이어지네. 여기서 석양을 보면 그렇게 예쁘다던데”

“우리도 보러 갈 거야”


흥분한 우리를 보고 택시 아저씨는 나에게 물었다.


“쿠바에는 처음이야?”

“아니요. 저는 두 번째 오는 거고요. 엄마는 처음이에요.”


숙소가 위치한 올드 아바나에 들어서자 나는 수라마와 있었던 여러 추억들이 떠올랐다. 새벽에 사전 예약을 하지 않은 여행객이 갑자기 도착하자 흰색 파자마 차림의 수라마 아줌마와 함께 여행객 가방을 들고 다른 숙소로 대려다 준 기억, 내가 아바나를 떠나는 날 이곳에 자리가 없어 다른 숙소에 머물고 있었던 나에게 아주머니가 아침을 해준 추억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쿠바 택시에는 당연히 GPS가 없기에 택시 기사 아저씨는 골목에 도착해 지나가는 쿠바 사람들을 잡아서 길을 물어보았다. 그때 내 눈앞에 안나 수라마라는 파란색 민박집 간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 집이에요”


택시에서 내린 후 직감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수라마 아줌마가 위층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5년 전에 처음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도 수라마는 발코니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3층이야!" 올라가니 따뜻한 포옹을 하며 여정은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엄마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5년 전에는 나를 보자마자 취조하듯 물었는데 말이다. “혼자 왔니?", "왜? 남자 친구가 없어?" 오랜만에 본 수라마는 살이 조금 찐 것 말고는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그때와 다름없는 엄청난 포스와 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저 기억하세요?”

“물론 기억나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요.”

“안 온 지 좀 됐네”


정확히 말하면 5년 전에 처음 오고 그 이후로 다시 오지 않았는데, 수라마는 마치 한참 오던 사람이 얼마 전부터 안 왔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수라마다운 말투였다.


수라마의 민박집은 수라마가 실제로 살고 있으며 민박을 하고 있지만 콜로니얼 양식에 예전 골동품들 및 오래된 가구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엄마도 보면서 예쁘다고 연달아 감탄했다.


수라마 민박집 ⓒ 주형원


수라마 아주머니는 우리를 방에 안내하고는 말했다. 5년 전 내가 일주일 가까이 머물렀던 그 방이었다.


“내일 아침 몇 시에 먹을 거야? 여권 정보 기입 이런 거는 내일 하자. 내 생일이라 지금 친구들이랑 전 남편이 와서 한 잔 하고 있거든. 저번에 내 전 남편 봤던가? 우리 딸 아빠야.”


그녀는 그러면서 자신의 전남편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이것도 쿠바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 소멸하는 순간 더 이상 결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쿠바인들은 평균적으로 결혼을 몇 번씩 하고, 전남편 전부인과도 친구처럼 잘 지낸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쿠바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이다.


쿠바인들에게 유일한 의무는 '사랑'이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일이요? 언제요?”

“오늘”

“오늘이 생일이세요? 생일 축하해요. 아주머니 주려고 가져온 작은 선물이 있는데”


수라마는 내가 쿠바를 떠날 때 들고 있었던 단순한 백을 굉장히 부러워했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런 거 하나 갔다 주라고 부탁했다. 그때는 가져가야 할 짐과 선물들이 내 배낭에 다 들어가지 못해서 주고 오지 못했지만, 그때 했던 약속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라마에게 선물로 줄 자주색 백과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가져왔다. 마침 오늘이 수라마의 생일이라니 딱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수라마는 선물을 받고 기뻐하며 고맙다고 포옹을 했다.




쿠바에 오기 전에 나는 엄마에게 진정한 모히또는 쿠바에서만 마실 수 있다고 입이 닳도록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안 데는 엄마도 숙소에서 짐을 풀면서 들떠서 말했다.


“이제 우리 모히또 한잔하러 가는 거야?”


아바나 비에하 광장 ⓒ 주형원

우리는 숙소 바로 옆의 비에하 광장으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다 닫혀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점원의 추천에 따라 그 집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사랑의 칵테일’과 그 레스토랑의 이름을 딴 모히또 한 잔 잔을 시켰다.


곧 여태껏 평생 살면서 먹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칵테일 두 잔이 나왔다. ‘사랑의 칵테일’에는 여러 과일이, 모히또에는 커다란 사탕수수가 꽂혀 있었다. 엄마도 흥분하며 말했다.


“세상에 이거 봐봐”


모히또 ⓒ 주형원

우리는 쿠바 음식과 근사한 칵테일 두 잔을 마시며 밤늦게까지 비에하 광장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엄마는 ‘여기서는 정말 해방이야’를 반복하며,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했다. 바로 옆에서는 쿠바 밴드가 흥에 넘치는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엄마와 나도 달달한 칵테일에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새벽까지 이런저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아바나의 첫날밤은 칵테일처럼 달콤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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