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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n 12. 2019

공항에서 만난 천사

한국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 상하이를 경유하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여행이라 저렴한 표를 찾다 보니 상하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다음 날 오후에 파리로 돌아가는 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표를 살 때만 해도 남편과 나는 긴 경유 시간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상하이 시내로 가서 야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공항으로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하며 신나게 또 다른 여행을 계획했다.

상하이에는 여러 야시장이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힘든 독특한 음식들이 즐비한 사진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상하이에 도착하면 공항을 나가서 바로 야시장으로 가면 되겠다.”

하지만 상하이에 도착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돈을 인출해야 하는데, 카드에서 인출이 안 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환전해온 돈이 전혀 없었고, 지갑에는 만원 조금 넘는 한화만 남아 있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열심히 인출을 시도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고대하는 현금은 나오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만 떴다. 기기의 문제라고 확신하고 물어서 다른 층에 있는 현금 인출기로 가서 재 시도를 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일단 있는 한화라도 바꿔보려고 하니 환전소 직원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수수료가 거의 만 원인데요”라고 말했다. 수수료가 만원가까우니 기껏해야 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바꾸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공항을 나가려면 남편과 내가 각각 지니고 있는 엄청난 무게의 대형 트렁크 두 개를 맡겨야 하는데, 공항의 짐 보관서에서는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이건 꼼짝없이 공항에서 이 짐을 다 갖고 하루를 노숙해야 하는 참이었다.


슬슬 고프기 시작한 배는 수중에 쓸 수 있는 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급격하게 허기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일단 뭐라도 먹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눈앞에 보이는 맥도널드로 갔다.

주문을 마치고 카드로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황당한 말을 하였다. “카드로는 계산이 안 돼요.” 아니 어떻게 세계적인 기업 맥도널드에서, 그것도 대도시 공항에 있는 지점에서 카드 계산이 안 된다는 말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럼 한화로 낼 수 있을까요?” 했더니, 직원의 냉담한 대답만 돌아왔다. “아니요. 중국 돈만 받아요.” 상하이 야시장은커녕 이러다가는 꼴딱 굶으면서 하루를 공항에서 노숙하며 보내게 생긴 셈이다. 물론 애당초 어느 정도 환전을 해오지 않은 우리 잘못이 크지만, 여기도 정말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테이블로 돌아가서 흥분하며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하는데, 갑자기 우리의 테이블 위에 100위안짜리 지폐 한 장이 살포시 놓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한 남자가 미소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이번에 여행하고 남은 중국 돈이에요. 방금 당신이 카운터에서 위안이 없어 당황한 모습을 봤어요. 있는 다른 화폐로 원하시는 만큼만 주셔도 되고, 아니면 아무것도 안 주셔도 돼요. 일단 이걸로 계산하고 드세요.”

순간 머릿속에는 ‘이건 또 무슨 신종 사기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남편과 이 돈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눈빛으로 교환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저희는 한화밖에 없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주고 싶은 만큼만 주세요. 얼마 안 되니까, 제가 드린 것 이상으로는 주지 마세요.”

지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한화를 꺼내서 건네준 후에야, 이 사람은 또 이 돈을 언제 환전할까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한국에 가실 계획이 있으세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없었는데 모르죠. 이제 이 돈이 생겼으니 조만간 한국을 여행하게 될 수도.”

우리는 그렇게 야시장 대신 상하이 공항 맥도널드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오늘의 천사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우리에게 즉흥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건넨 그는 피지섬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인디언이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뭔가를 선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가방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도중 번뜻 뭔가가 떠올랐다. 엊그제 남편과 함께 간 템플스테이에서 108개의 구슬을 직접 꿰어 만든 염주였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남편이 한국에 오면 꼭 해보고 싶던 것 중 하나가 템플 스테이라, 이번 일정의 마지막 주말을 서울에 있는 한 절에서 보냈었다. 여러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가 108배를 한 후 그 기도의 마음을 담아 염주를 꿰어 만드는 것이었다.

다녀와서 자칫하면 잊어버리고 갈 뻔했는데, 짐을 다 챙긴 후 마지막에 발견하고는 가방에 넣었다. ‘여행이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지’라는 마음과 함께. 나는 가방에서 염주를 꺼내 그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제가 엊그제 한국의 한 절에서 만든 염주인데 고마워서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우리도 이렇게 당신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으니, 당신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그러다 그는 예상치 않은 선물에 놀라며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저도 당신들을 만나 너무 기뻐요. 이렇게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을 저한테 줘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저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에요. 여행하는 운명이죠. 서울에서 상하이로 와서 당신을 만나 뉴질랜드로 가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당신도 원한다면 언젠간 주고 싶은 다른 이에게 주면 돼요.”

그는 소중하게 내가 준 선물을 만지며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방 안에 넣고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저도 언젠가 굉장히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줄게요.”

갑자기 떠올라서 준 아주 작은 선물인데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상대가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행복해졌다. 우리도 이번 한국 여행 동안 여러 선물을 받고 주었다. 우연히 만난 한 스님이 자신이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남편에게 선물했고, 남편도 여러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모자에 차고 있었던 산티아고의 상징 조가비 브로치를 아는 수녀님에게 선물했다.

남편이 자신과 산티아고 길을  함께 한 그 브로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이거 산티아고 상징 아니에요”라는 질문에 바로 수녀님에게 선물이라며 건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녀님도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말했다.

“나와는 이미 많은 추억이 있지만, 당신에게 가면 또 새로운 추억이 생길 거예요.”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건넨 마음의 선물은, 받는 사람도 그리고 주는 사람도 행복하게 했다. 스님은 남편에게 “이게 당신에 대한 나의 기도예요”라며 건네었고, 수녀님도 남편에게 “이 조가비를 볼 때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고 했다. 나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속한 것들이 소유를 벗어나자 행복과 기도가 순환했다. 이제 비행기 탈 시간이라 가야겠다며,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아름답죠. 조금만 다른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지거든요.”





그렇게 그와 헤어진 우리는 상하이 시내 관광은 포기하고, 공항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모든 게 계획대로 잘 풀렸다면. 그랬다면 그를 만날 수 없었겠지. 그랬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또 누군가에게 작은 선물로 기쁨을 줄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공항에 있으니,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세계인 공항에서 잠을 자고(비록 공항 의자에서 쭈그려 자도),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고 사람들도 관찰했다.

그렇게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쪽잠을 잤어도 씻지 못했어도,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처럼 편했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고, 심지어 떠날 때가 되니 아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졌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모든 여행은 달라졌다. 그의 덕분에 악몽처럼 느껴질 수 있던 공항에서의 하루가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같은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냥 모른 척 지나쳤을 거 같다. 하지만 그에게 선물한 염주가 언젠간 다른 이에게 건네질 것처럼, 그가 우리에게 베푼 선행 또한 언젠가 다른 이에게 돌려줄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연결 고리처럼 결국 돌고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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