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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Feb 17. 2023

도플갱어, 만나도 안 죽습니다.

80번 소개팅의 전말

이건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이야기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애 같은 면을 벗지 못해서 동네 놀이터에서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곤 했다. 당시 자주 함께 했 멤버는 '자라오빠'였다. 별 뜻은 없었고 단지 자라를 닮아서 자라였다.


같은 미술학원 출신이었고 내 친구를 짝사랑 중인 오빠였다. 그래서 자주 만났다.


바다 근처에 있는 동네라, 저녁이 되면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 얇은 꽃무늬 원피스 끝자락이 날렸다. 늦여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늦은 시간 놀이터에서 맥주나 한 캔 할까 했는데. 자라가 느닷없이 남자 소개해줄까. 했다.


 갑자기? 나 소개팅 같은 거 해본 적 없는데.


 그러니까 한 번 해봐.


나는 어색함에 괜히 입을 삐죽 대며 어두컴컴한 실내포차로 들어갔다. 자라의 친구가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자라가 "여어." 하고 알은척 하자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패션은 개그맨 김해준의 부캐인 쿨 제이, 얼굴은 더 글로리의 전재준 같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서 윤이 났다.


몇 마디 나누고 술 한잔 들어가니

뇌의 어느 한 부분에서 도파민을 막고 있던 문이 펑하고 터지듯 열리는 게 느껴졌다. 즐거움 갇혀있던 물처럼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온몸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쿨 재준이도 점차 기분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고 우리는 밤새 크게 웃다가 술집에서 쫓겨났다.


삼일 뒤, 나는 재준과 둘만 만나 내가 좋아하는 놀이터에서 술도 마시고 바다에도 갔다. 어떤 날에는 그의 집에 놀러 가 그 엄마가 썰어준 수박도 얻어먹었다.


그 집 엄마가 재준이 군대 가면 기다려달라고도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했다.






재준과의 알록달록한 나날들을 보내던 한때. 그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 모임 있어. 남자들끼리만 만나는 거라, 너는 못 데려가.


나는 문자를 보고서는 입을 내밀고 자라에게 연락했다.


 재준오빠가 난 못 데려간데. 근데 넌 동창인데, 안 가냐? 왕따.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던 나는 재준에게 전활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있었다.






그날 나는 자라를 불러냈다. 같이 세이브 존에서 쇼핑을 하고 민들레 영토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늘 만나던 장소에서 만나 괜히 주먹으로 서로의 어깨를 때리고 부딪히고 낄낄거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나는, 내 뒤를 본 자라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재준이가 풍기던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불가리 블루.


나는 본능보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익숙한 뒷모습이 우리를 지나쳐 걷고 있었다. 쿨 재준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어떤 여자도 함께 걷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 스킨십은 없었지만 재준이 어깨에 그 여자의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할머니들이나 들 것 같은 보라색에 왕리본이 달린 촌스러운 가방이었다.


 야.


내가 소리 질러 불렀지만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여자한테 빠져서 귀가 먹었는지 돌아볼 생각을 안 했다.


나는 달려가서 쿨 재준의 어깨에 옹색하게 매달려있던 가방끈을 세게 잡아당겼다.


 야. 안 들려?


재준과 옆에 있던 여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고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마를 타고 아래로 흐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눈매를, 가슴을. 허리와 구두를 내려다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여자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갸우뚱했던 것 같은데, 잠시 후 그 여자의 얼굴이 아침마다 보아온- 거울 속 내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도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다. 귀 옆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잔머리가 바람에 날려 그 여자의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쿨 재준은 촌닭 같은 가방을 여자에게 넘기며 내게


 기쁨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나는 쿨 재준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내가 뭘 생각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대여섯 번가량 비슷한 전화를 받은 기억이 있다.


 너 미술학원에 간 거 아냐? 왜 종로학원에 있어?


 무슨 말이야. 나 미술학원인데.


 나 오늘 OO학교 앞에서 너 봤다?


 나 거기 간 적 없는데.


동네에 나랑 비슷하게 생긴 애가 살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했었지만 7년 내내 그런 소릴 들으면서도 실물은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 거였다. 걔 이름은 양지영이었다.


사실 쿨 재준은 고등학생 내내 한 학년 후배인 양지영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면 받아 줄만도 한데 양지영이는 절대 받아주지 않으면서 만날 건 다 만나고 받을 건 다 받는, 그야말로 양아치 같은 기집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재준이 자라의 휴대폰에서 내 사진을 본 거였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나는 민들레 영토 옆 골목에서 자라를 몰아세웠다. 민망할 때마다 늘 그랬듯, 자라가 거북목을 자꾸 앞으로 냈다 뺐다 했다.


 야. 너 지금 장난해? 장난하냐고. 너 저 기집애 있는 거. 심지어 나랑 겁나 똑같이 생긴 거 알고도 날 소개해? 아 겁나 똑같네? 뭐지 이건?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니들 짰냐?


 아니 나는 그른 거 생각 못했어. 오래돼서 그게. 아예 기억도 못했고 지금도 둘이 만나고 그른 거 몰랐어. 진짜. 아 내가 일부러 그랬겠냐. 니 성질 어떤지도 아는데.


야 이.



그것 참 묘하게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 상했다. 재준은 나와 잘 지내고 있으면서도 양지영을 만나려고 애썼다. 나한테는 없는 뭔가가 있는 건가. 양지영에게는. 그럼 그건 뭘까.


그날 양지영을 만난 충격에, 현장에서 재준에게 더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날 나는 자라와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시고 울고, 집에 돌아와 기절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꽃무늬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소시지가 된 눈두덩이에 마스카라가 덕지덕지 뭉개져 있었다.


양지영이도 술을 마시고 울면 이런 몰골일까.

기분이 나빴다.


마상을 입고 몇 날 며칠을 앓다가 재준에 대한 기억을 길바닥에 버려버렸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자라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쿨 재준은 해병대로 들어갔다. 군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양지영에게 고백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서울로 올라왔고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얼마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전화는 잘 받지 않는데 왠지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자라였다.


 뭐야. 한국 왔어?


 어. 온 지 한 2주 됐어. 너는. 부산 내려왔냐?


 뭔 소리야. 느닷없이. 내가 부산엘 왜 가. 


 아니. 방금 차 끌고 e-마트 지나는데, 너 본 것 같아서.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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