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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Feb 23. 2023

제발 제 얼굴 좀 내려주세요.

80번 소개팅의 전말

참으로 신비로운 건, 그렇게 데이고도 언제나, 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연애한다는 거다.

류시화 시인도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부류는, 분명 철이 없는 거겠지.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거기에 어떻게 부작용이 없을까.


어느 날 J와 나는 동시에 같은 알림톡을 받았다. 대충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저희 OOO의 회원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이제 번거롭던 만남의 과정이 더욱 간편해졌다! OOO앱 출시! 앱을 설치해 주세요!]
 
기쁨회원님 안녕하세요. 김OO매니저입니다 :) 저희가 이번에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어요. 어플을 빠딱빠딱 다운 받아주시구요 :) 기념으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참여하시고 다양한 혜택을 받아보세요!!

기쁨회원님께서 지난번에 J 님과 커플이 되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혹시 커플 사진제출과 인터뷰에 동의해 주신다면 앱 메인화면에 실어드리려 합니다.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많은 예쁜 커플들이 참여해 주셨어요~♥♥♥ 기쁨 님도 함께 해주시면 호텔 숙박권, 커피 교환권, 커플 야외 사진 촬영권 등을 선물해드리고 있어요. 신청하시는 방법은 앱 하단 왼쪽 신청하기-> 신청하기-> 완전 신청하기-> 눌러주시면 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앱이 생기면 신입들은 기존 회원들보다 더 저렴하게 가입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J에게서 톡이 왔다. 저기에 참여하자고 말이다.


그때만 해도 J는 나의 운명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했다가, 아니 아니야. 우린 뭐랄까. 가장 좋은 시기에 만났으며 가장 완벽한 시기에 만난 거야.라는. 바퀴벌레 한 쌍같은 소릴 늘어놨다. 그러한 소년소녀 갬성에 취해있던 나는 관종인 J를 위해서 그래그래. 사진을 제출하자고 대답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식장 걸어 들어가도 모르는 요즘시대에 웬만하면 온라인상에 사진 같은 걸 남기는 건 좀 그렇지 않냐는 충고를 했지만. 늦은 나이에 미치면 침을 더 많이 흘린다고, 애들이 하는 소리들이 하나같이 질투로 느껴졌다. 늬들은 아직 못 만나봐서 모른다. 나는 너희들의 질투를 즐기련다.라는. 병다리 같은 생각을 했다.


나와 J는 정성스럽게 사진을 고르고, 인터뷰를 작성하고 서로 바꾸어보고 낄낄거리며 주접을 떨었다. 그리고 그걸 제출하고 나서 잊을만할 때쯤, 정말로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 하게 게시되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호텔 숙박권과 커피 교환권과 사진 촬영권을 얻어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뿌듯하게 만들었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앱을 들락거렸다. 사진 속의 우리가 우리를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선물은 알차게 사용했다. 선유도 공원에 놀러 갔다가 커피를 바꿔먹었고, 한껏 드레스업 한 후에 커플사진을 찍고 호캉스를 즐겼다. 그건 정말이지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헤어졌지만 추억이 어떻게 사라질까. J와의 즐거웠던 날들은 이미 추억에서 기억으로 바뀌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분홍색이다.






J와 헤어지고 나서(브런치북 80번 소개팅의 전말- 계란후라이는 60그램입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너 뭐야. 너 J랑 아직도 사겨?


 아. 무슨 봉창이야. 뭔 소리야.


 OOO앱 메인 화면에 이거 너네 아냐?


 어머. 아이. 아 이거 내려달라는 소릴 안 했네. 짜증 나서 1도 안 들어갔거든······. 근데, 야. 니가 거길 왜 들어갔어?

 

 어? 아니. 나도 해볼······까? 이거 많이 비싸니?


아. 나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에서 머리를 쥐어쌌다. 앱엘 들어갔더니 그 공간에서는 아직도 J와 내가 연애 중이었다.


황급한 마음에 사무실 복도로 나와 OOO회사 CS센터로 연락했다.


상담원이 방금 점심을 먹어 그런지 나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저기, 저 헤어졌는데 아직도 메인에 떠있어요.


 예?


참으로 웃긴 건 그렇게 말한다고 바로 내려주는 게 아니었다. 상담원은 절차가 필요하다며 그 내용에 관한 메일을 주겠다고 했다. 그냥 지우면 되지 무슨 절.차.


사무실에 들어와서 편지함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말이 좋아 절차이지 호텔 숙박비용, 커피값, 사진 비용을 다시 토해내라는 내용이었다. J 님과 반띵 하시면 됩니다.라는 내용도 포함해서.


나는 답장을 썼다. 그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답장
아니. 너님들이 내 얼굴 4개월 동안이나 쓰셨잖아요. 혜택이라면서요. 이렇게 한참 동안 얼굴을 널리 알렸는데 이제 와서 호텔 숙박권에 사진 촬영비, 커피값까지 싹 다 내놓으라니. 정책이 너무 양아치스럽지 않나요? 심지어 헤어진 지도 한 달이 넘었는데.

RE:
^^ 기쁨 님, 이건 저희 회사 규정입니다. 처음에 사진 제출하실 때 동의 하셨잖아요. 잘 기억해 보셔요.
일루 금액 넣으세요. J 님과 반띵 했습니다.
계좌 123-4567-8910

->답장
좀 깎아주시면 안 돼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너무 별로라 그래요. 아니 너무하잖아요. 이미 얼굴 사용을 다 했는데 그 대가를 고대로 다 내놓으라니 말이 되냐고요. 까꾸로 보나 바로 보나 이건 명백한 제 손해죠.

RE:
:) 어이구, 그러시군요. 계산도 잘하셔라. 알겠습니다. 근데 그건 본인 사정이시구요 :) 기쁨 님, 이건 저희 윗대가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성의 있게 모여서 성실하게 만든 양아치 같은 규정입니다. 처음에 사진 제출하실 때 동의 하셨잖아요. 잘 기억해 보셔요.

->답장
직업이 앵무새냐? 쫌 깎아 주세요.

RE:
안됩니다.

->답장
한 푼도?



대략 이런 내용의 메일을 몇 번 주고받으니 그야말로 힘이 다 빠졌다. 그날 오후 나는 백 원짜리 잔잔바리까지 반띵 된 금액을 저쪽 계좌로 송금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봤을 텐데. 이런 식으로 혼삿길이 막히는 건가.

친구에게 통화로 이런 얘길 하자 이렇게 말했다.


 야. 니 얼굴을 누가 기억해. 그 메인에 떠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름이랑 얼굴 생각나는 사람 있어?


 없긴 하지.


 그래. 그렇다니까.


내 친구들은 나만 빼놓고 모두 이성적이다. 지혜롭고. 그게 얼마나 내게 위안이 되는지.






그러나 다음 날 앱에 접속했을 때.

나와 J의 사진이 그대로 떠있었다.


 악.


콜센터로 다시 전화를 걸자, 전의 그 졸린 직원이 다시 받았다.


도대체 왜 아직도 내 사진을 내리지 않았냐고 다그쳤더니 J가 절반 되는 돈을 내지 않아서 내려줄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도 J는 돈을 내지 않았다. 

몇 번이나 J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나는 다시 콜센터에 전활 걸어 거의 울다시피 했다.


 제발 제 얼굴 좀 내려주세요.


나는 J가 내야 될 나머지 절반을 입금했다. 그러고 나서도 삼일이 지나서야, 사진이 내려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계절은 변했고,


새로운 마음으로 소개팅엘 나갔다. 꽤 오랜만이었다. J가 마지막이었으니 8개월 만이었다.


만남은 내 집 근처에서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논현동까지 나갔다. 카페에는 해가 잘 들었고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대화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어쩌면 이번엔, 아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아래층에서 단정한 검정 머리카락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그가 마스크를 벗으며 웃었다.


앞니가 벌어져 웃을 때 입 모양이 헤퍼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는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어색하네요, 어색하네요.를 반복하다 갑작스럽게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분 맞으시죠?

 

 네 뭐가요?


 그때 그. 앱 메인에 계시던 분.


나는 한쪽 볼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아닌데요.


 에이. 거짓말하시네. 왜 거짓말해요.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이라뇨. 죄송한데요. 기분이 너무 별로라 앉아있을 수가 없겠네요. 빵 드시고 들어가세요.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서서 나와버렸다.


한참을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이 걸었다. 그러다 뱅뱅사거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언제까지 걸을 거야. 진정하고 기쁨아. 집에 가야지.


숨이 고르게 쉬어질때쯤, 마스크를 테이블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소매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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