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전화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by 시드니


글쓰기가 멈춘 지 두 달. 그 사이에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환갑이 다 되어도 나는 철이 없는지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좋다. 엄마는 오래 아팠다. 떠나시기 전 몇 년은 요양병원에서 아예 나오지 못했다. 코로나가 오고 나서는 지난 2년 동안 면회도 없이 거의 감옥 같은 생활을 하셨다.


엄마의 병세가 어려워질 때마다 이 병원 저 병원에서 매번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약을 했지만, 막상 그때가 오면 서약은 무용했다. 언제가 정말 엄마의 마지막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고 엄마는 기어코 아플 만큼 아프시고 떠나셨다.


그래서였을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정작 그동안 아픈 엄마를 정말 고생하며 모셨던 딸들은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나는 그 슬픔이 외려 더 슬펐다. 그래도 무심한 아들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엄마는 생전에 뭐든 그럴싸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러나 엄마의 아들들은 그런 엄마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래서 엄마는 끝까지 나이 든 아들들을 걱정하며 생을 마치셨다. 그나마 장례식이 그럴듯했던 것은 오로지 심청이가 셋이나 됐던 덕이었다.


아들딸 다섯이 모두 결혼해서 하나가 둘이 되고 거기서 손주들까지 스무 명이나 되는 자손들이 엄마의 곁을 지켰으니 아무래도 엄마는 그렇게 많이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엄마가 떠났는데 왜 나는 슬프지 않았을까. 엄마가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되어서일까?


장례식 둘째 날 오후 늦은 시간에 대여섯 명의 조문객이 한 번에 들어왔다. 그중 맨 앞에 있던 어느 노인의 눈이 너무나 슬펐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누구일지 짐작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절을 하고 마스크를 벗자 그분이 이모부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사촌 형제들과 엄마의 동생 삼촌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자식 다섯이 아니라 여섯을 키웠다. 엄마는 딸 둘만 있던 친정의 대를 잇는다고 나보다 어린 삼촌을 양자로 들여 키웠다.


그래도 그때는 좀 살았는지 엄마는 그런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우리 집은 크게 망했고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찢어졌다. 그 후 이모네 가족과 삼촌과는 떨어져 산 것이 몇십 년이 되었으니 마스크를 쓴 그들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런데 늙으신 이모부의 손을 잡고 나는 갑자기 오열했다. 울음을 멈추지 못해 뒤이은 조문객들이 멈추어 서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의 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딱히 짐작도 안 되는 슬픔이 엄마의 그 모든 세월로 오롯이 아파져 왔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엄마의 고생은 극에 달했다. 더불어 나와 형제들의 고생도 찬란해졌지만, 그런 자식들을 대여섯이나 둔 엄마의 하루는 정말 미치도록 고단했다. 나는 그 고단함의 정도를 아직도 가늠할 수 없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을 사십 중반 한 여인의 손에 대여섯 명의 어린 생사가 감겨있었고, 엄마는 온몸이 부서지도록 그것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막상 자식들이 장성해 고생이 끝나야 할 때쯤부터 막무가내로 아팠다. 엄마는 언제나 삶에 대해 무작정 끈질겼다. 젊어 멍든 육신이 늙어 아파져도 엄마는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나 버티는 것은 그저 버티는 것이었고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어서 고통만이 남았다.


엄마는 늙고 아플수록 투정이 심해졌다. 치매가 심해진 그때쯤에는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돌아가면서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엄마의 전화를 종종 받지 않았다. 엄마는 심청이들에게는 이유 없는 채권자였고, 아들들에게는 알 수 없는 채무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엄마가 떠나고 더 이상 엄마로부터의 전화는 울리지 않는다. 지겨웠던 엄마의 전화 목록에서 빨간색인 부재중 전화 목록이 도드라졌다. 이 빨간색의 부재중 전화를 받았으면 미련이 좀 덜 했을까. 하긴 우리 심청이들의 슬픔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엄마의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내 휴대폰에 있는 엄마로부터 걸려 온 수많은 전화 목록만이 남았다. 나는 이것을 삭제할 수 있을까. 내가 삭제할 수 있는 엄마의 기억이 있기는 한 걸까.


엄마는 라면을 짜게 끓였다. 몇 년 전 그래도 엄마가 부축을 받으며 일어설 수 있을 때 엄마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나에게 라면을 끓여 줬다. 딸들인 심청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호사였다. 그 짠 라면 냄새의 기억은 잊지 못하겠지.


팔십이 넘어 오십 넘은 아들의 입에 들어가는 라면을 보고 흐뭇해했던 엄마에게서 전화가 없다. 하루에 수십 통씩 오던 전화가 오지 않는다. 내 휴대폰에 있는 빨간색 엄마의 부재중 전화 목록이 나의 엄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중단하였던 글을 계속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은 어느 부분에서 엄마의 기억이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엄마가 이제는 더 아프지 않아서 그게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사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엄마 앞에서 꼭 하고 싶었는데 한 번도 못 해 본 일이 있어요. 엄마 앞에서 펑펑 울어보는 거였죠. 그런데 한 번도 못 해봤어요. 하지만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 산소 앞에서는 혼자서 펑펑 울어도 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엄마를 위해서 정말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던 엄마의 딸들 엄마의 심청이들 이유 없는 엄마의 채무자들이었던 나의 누나와 매형 그리고 여동생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엄마가 양지바른 곳에서 따뜻하게 더는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삶의 숙제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엄마의 효녀들 덕이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새삼 심청이는 역시 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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