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 아빠는 괜찮아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2009년 김대중과 노무현이 서거했다. 두 사람은 이념의 시대에 맏이와 막내를 자처했지만, 이들이 떠나고도 한반도는 이념의 굴레를 넘지 못했다. 한반도는 그렇게 이미 지나간 세기말적 이념의 경계선 끝에서 요동치는 세상의 변화와 혼돈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수와 태길은 그저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경계에서 만족했다. 둘은 한 달에 한 번쯤 같이 있었다. 둘의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아쉬울 만큼 적당했다. 두 사람에게 처음부터 그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태길은 불구덩이 같이 치밀어 오르는 지수에 대한 사랑을 잔인할 정도로 억눌러야 했고, 지수도 그처럼 뜨거웠으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수진을 보면 이내 식었다. 그리고 어느새 사십 대 중년이 된 지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이 든 자기 얼굴이 싫지 않고 오히려 편했다. 태길과도 그렇게 편해졌다. 뜨겁지 않으나 따뜻했고, 잔잔했다.


지수가 나이 들자 서희와 종세는 늙어 갔다. 아니 이미 늙어 있었다. 근래 종세는 병원 일을 그만두었다. 종세는 언젠가부터 불편했고,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서희는 그런 종세에게 놀라지 않았다. 늙었고 더 늙어가고 있으니 종세가 쉬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집에 있는 종세에 대한 서희의 잔소리가 늘었으나 종세는 그런 서희가 익숙했다. 늙은 서희와 종세 그리고 나이 든 지수, 커가는 수진은 그렇게 쌍문동 2층 집에서 투덜거리고 웃으며 해가 지면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그날도 그런 평범한 하루의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지수는 동동거리며 출근을 서둘렀고 서희는 그런 지수를 탓하며 수진의 등굣길도 재촉했다. 아침에 종세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도 종세를 찾지 않았다.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으려니 했지만, 바쁜 아침에 모두들 신경 쓰지 못했다.


지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차에 시동을 걸고 골목길을 나설 때쯤 멀리서 종세가 보였다. 저 멀리서 종세는 골목길가에 서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지수가 급히 차를 세우고 뛰어내려 종세에게 달려갔다.


“아빠! 무슨 일이야! 여기 왜 서있어요!”


종세는 그런 지수를 보고 손을 치켜올렸다.


“지수야! 지수야! 어디 갔다 이제 오니? 괜찮은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 ~ 우리 아기 이제 괜찮아 ~ 아빠랑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아빠는 절대 네 곁에 있을 거야 엄마도 그럴 거고. 우리 딸 괜찮아? 괜찮아?”


지수는 그러는 종세에게도 놀랐지만 그런 종세가 맨발인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아빠! ~”


놀란 지수가 출근길에서 종세를 데리고 서희와 함께 곧바로 병원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병원에서는 종세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교수는 종세의 제자 같은 후배였고 평소에도 잘 아는 사이였다.


“형수님! 많이 놀라셨죠.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선배가 하도 말리는 바람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걱정했어요. 그래도 지수가 먼저 봐서 사고가 않나 다행입니다”


종세는 서희와 지수가 모르게 자신이 급속하게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왔다. 이교수는 그러다 큰 일 난다며 종세를 말렸지만, 종세의 태도는 완강했다.


“이교수 그 언젠가는 모두들 알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오늘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고 싶네~ 이제 겨우 지수가 웃고 다녀! 수진이도 밝게 크고 있고, 요즘 지수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 허허허 ~”


종세는 그저 요즘이 좋았다. 모든 평화가 있었고 웃고 있는 지수와 함께 깔깔거리는 손녀가 자라고 있으니 종세와 서희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종세는 자신의 치매가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 행복한 날이 하루라도 계속된다면 어떤 희생도 좋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이 순간에 서희와 지수 그리고 눈에 넣기도 겨운 손녀 수진이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종세는 숨길 수 없는 때가 되면 알려달라고 하며 난감해하는 이교수를 채근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종세를 바라보는 서희와 지수의 눈빛은 달랐다. 서희는 무서운 눈으로 종세를 바라보면서도 종세게 왜 그랬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 지수는 덫에 걸린 토끼 눈을 하고 종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 지수 많이 놀랐지 … 아빠는 괜찮아! 치매가 모르는 병도 아니고 늙으면 다들 그런 거지 … 이제 다들 알았으니 앞으로 이렇게 놀랄 일은 없을 거다”


종세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지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한 손으로는 서희의 손을 잡았다. 서희의 손은 땀에 찾으나 결연했고 굳게 종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여보! 그냥 우리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시다. 난 당신 만나서 참 잘살았어요. 매 순간이 놀라웠고, 매시간이 아득했오. 너무 쥐면 아플까 싶었고 아니면 날아갈까 애달파했지. 이제 지수도 편안해졌으니 천천히 순서대로 준비한다고 생각합시다. 당신이 있으면 등살에 아예 정신줄 놓을 수는 없을 테니 미리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지수야 ~ 아빠는 이제 괜찮아! 이제는 더 놀라지 않아도 돼! 우리 지수 다 잘될 거야~ 아빠는 괜찮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의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