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 아빠가 부탁해
From 1919 to 2022
사랑하는 아빠 딸 지수에게
엄마와 아빠는 우리 지수가 있고부터 언제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지수가 예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거기에 더할 말이 있을까. 지수가 아빠의 검지 손가락을 잡고 아장아장 걸을 때에도 늘씬한 아가씨가 되어서 성큼성큼 걸을 때에도 사람들은 우리 지수가 지나가면 언제나 뒤돌아 보았지. 그때마다 아빠 어깨가 얼마나 으쓱했는지 그 기분은 아마 지수 같은 예쁜 딸의 아빠가 아니면 절대 모를 거야.
지수가 크는 것을 보며, 놀랍도록 엄마를 닮아서 사실 아빠는 매번 놀랐다. 엄마를 처음 만났던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지수를 보는 것 같았어. 그때 엄마를 처음보고 아빠는 참 많이 놀랐었거든. 그 다방의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서는데 난 단박에 내가 기다리던 여자인 것을 알았다. 엄마는 정말 눈이 부시게 하얗게 웃고 있었어.
우리 지수의 큰 키는 아빠를 닮았고 나머지는 모두 엄마를 닮았지. 뭐든 시원시원하고 똑 부러지고 뒤끝 없는 거는 정말 엄마를 똑 닮았어. 아빠는 그런 지수의 엄마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다. 남들은 평생을 어찌 그리 똑같이 예쁠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아빤 정말 그렇더라. 물정 없는 아빠랑 사는 덕에 남들은 의사 마누라라고 하지만, 정작 돈을 버는 궂은일은 엄마가 다했어. 아빠는 평생 그저 좋은 사람인 척하기만 하면 됐지.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았어. 아빠가 밖에서 티끌 하나 없는 신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의 희생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의 남편이 되어서 그 정성으로 살아주었으니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고마워할 수 있을까.
어느 겨울이었어. 아직 지수가 고개도 돌리지 못했던 때였지 아마. 누구나 못살던 시절이어서 추운 겨울에는 짤짤 끓는 방안에서도 호~ 하면 하얀 입김이 나왔는데, 아빠는 그 추웠던 어느 겨울날이 잊히지 않더라.
그날도 병원에서 퇴근하고 돈암동 단칸방에 있는 엄마와 지수에게 동동거리며 가고 있는데, 집에 다 와서 어떤 할머니가 추운 골목길에서 사과 몇 개를 두고 팔고 있는 거야. 하도 추웠던 날이라 그 할머니가 너무 딱해 보여 주머니를 다 털어서 할머니 사과를 모두 사서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대뜸 아빠를 보더니 ‘하 ~ 참 그 사과 밑에 할머니 거 다 가져온 거지요?’하며 혀를 차는 거야. 그래서 ‘아니 ~ 그걸 당신이 어떻게?’ ‘내가 좀 전에 연탄재 버리러 잠깐 나갔다가 엄동설한에 사과 파는 할머니가 있어서 몇 개 사줬는데, 사면서 이 양반이 들어오면서 다 떨이해 오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당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하면서 아빠를 째려보는 거야.
그때 아빠는 사실 너무 행복해서 엄마 앞에서 울 뻔했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와 딸이 따뜻한 방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고, 엄마는 실눈으로 아빠에게 투정했지만 우리는 남을 챙길 만큼 먹을 것이 있었으니 그때 아빠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단다.
엄마는 그리 예뻤지만 사실 많이 아팠다. 왜정 때는 아버지를 찾아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만주 벌판을 헤맸고, 전쟁 통에는 굶어 죽을 지경을 몇 번이나 넘기고서야 겨우 살아남더니 이번엔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감시받으면서 하루하루를 칼날 위에서 살았지. 아빠가 처음 엄마를 만난 날 엄마가 그러더라. ‘조국이나 민족 그런 거 말고 가족을 생각해 달라고’ 아빠는 엄마의 그 말을 평생 새기고 살았어. 죽음이 아니면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 다행히 그 약속은 지킨 것 같아.
그러나 꽃 같기만 네게 그 모진일이 닥치고 엄마는 정말 너랑 같이 죽으려고 했어. 나락에 떨어진 너와 절망에 빠진 엄마를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신을 원망하기도 했지. 나는 어떻게 어떻게 한 여인에게 그토록 모질 수 있냐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진짜 속내를 보이는 법이 없는 여자였어.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나빠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었지. 그랬던 엄마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가슴을 쥐어뜯을 때 아빠는 죽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지수한테 수진이가 온 거야. 우리는 이제 살았다 싶었다. 그 뒤로 엄마 아빠는 무서운 게 없어졌어. 지수가 수진이를 두고 그 먼 영국 땅에서 혼자 공부할 때도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네가 살길을 찾길 바라고 응원했지 걱정하지 않았어.
그렇게 우리 예쁜 딸 지수는 훌륭한 영화사 사장님이 되었지. 영국에서 너의 선생 로저와의 인연을 보고 지수와 엄마가 어찌 저리 똑같을까 했어. 우리도 스미스가 없었으면 인연이 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 미국 사람한테 신세를 많이 졌네. 지수가 앞으로 더 잘돼서 그들보다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 지수가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아빠는 천국에 있겠구나. 아빠는 꼭 천국에 있을 거야. 엄마랑 지수랑 수진이 같은 예쁘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의 남편이고, 아빠고 할아버진데 이런 백으로로 천국에 못 가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니.
아빠는 의사로서, 또 전쟁을 겪으면서 참 많은 죽음을 보았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에 있으며, 슬프지 않은 이별이 어디에 있을까. 그 많은 죽음 속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허무한 죽음이었어, 그렇게 애쓰고 살려고 바둥거렸는데 정말 이유도 없이 기어코 오고야 마는 죽음은 의사인 내게도 군인이었던 내게도 어떻게도 희석되지 않았던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런 내게 급속히 진행되는 병이 머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다행이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밝게 웃는 너를 보니 그 모진 때 신에게 나를 대신 죽여달라고 빌던 내가 생각나더라. 우리 지수가 다시 웃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버리겠다고 다짐했지. 그리고 우리 지수가 웃더라 할머니와 엄마를 똑 닮은 수진이와 함께.
아빠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 음 ~ 엄마가 걱정이지만, 엄마는 나보다 많이 어리니 그만큼 뒤에 오면 될 테지. 아주 아주 천천히 와도 되는 길이니. 아빠는 요즘 지수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아서 더 좋았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짝이 있는 게 좋단다. 서로 보살피고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면 외롭지 않아. 사람은 외롭지 않으면 된다. 더 어렵고 힘들 수 있지만 외롭지만 않으면 견뎌 낼 수 있어. 종기 생각에 지수가 그 친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은 것을 알아 …
하지만 그러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계를 두지 마렴.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돼! 아프면 아픈 만큼 슬프면 슬픈 만큼 함께하는 것만이 중요하단다. 아빠랑 엄마도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 우리 지수도 그렇게 살면 돼!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종기 녀석 잘 챙길게. 그놈 우리 딸 두고 너무 일찍 가버려서 아빠가 많이 미워했는데 이제 아빠가 그곳에서 종기가 궁금해하는 지수와 수진이 이야기 많이 해 줄게.
우리 예쁜 딸 지수! 잘살아야 돼! 지금처럼 하면 돼! 더 바랄 것 없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면 된단다. 아빠는 언제나 어디서나 엄마랑 우리 지수하고 수진이 곁에 있을 거야.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의 작은 새 나의 딸 지수야! 아빠가 남기고 가는 것은 없어! 우리 지수가 웃으니까 아빠는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어!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라. 우리 손녀 수진이도 지수처럼 행복하고 예쁜 사람이 될 거야.
언젠가는 엄마도 아빠에게 오겠지. 지수야! 아주 아주 천천히 오게 해 줘! 엄마는 아직 맛봐야 할 행복이 너무 많아. 아빠가 해줬어야 했는데, 어쩔 수가 없게 되었네. 엄마는 뭐든 잘 먹지만 잘 체해. 아마도 평소에 스스로 긴장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제 아빠도 없으니까 두 다리 쭉 펴고 양푼이 채로 밥 먹어도 된다고 말해 주렴. 아빠는 엄마를 평생 매일처럼 보면서도 언제나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이제는 좀 아니 아주 멀리 보고 싶네. 엄마가 지수랑 수진이랑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해서 아주 먼 뒤에 날에 따뜻한 아빠 이불속에 쏙 들어오게 해 주렴. 아빠가 부탁해!
그리고 뭐든 너무 애쓰지 마! 우리 아가 …
이제 아빠가 종기랑 함께 천국에서 엄마랑 지수랑 수진이를 지켜줄게!
지수! 우리 딸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