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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탁 Aug 10. 2024

우선은, 법기술자

 경고를 단단히 새기고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반년 동안 경험한 로스쿨에서의 공부는 대단히 삭막했다. 변호사가 되었거나 로스쿨에 먼저 들어간 지인들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는 로스쿨에서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주의를 줬다. 기존의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1년 차 과정까지의 공부량을 로스쿨 3년에 모두 때려 넣은 데다가, 이미 로스쿨 입학에 성공한 사람들끼리의 경쟁 속에서 변호사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굉장히 빡빡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명 '비법학사'로서 수험법학만의 독특한 세계가 다소 생경하게 다가왔다. 중요 판례들을 핵심 키워드를 뽑아 암기해야 했고, 계속해서 까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복해서 보아야 했으며, 외운 것들을 현출 해내기 위해 계속 쓰는 연습을 해야 했다. 여기에 '나의 생각', '나만의 독창적인 글쓰기', '다양성', '심사숙고와 토론', '개성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 따위의 것들이 틈입할 수 없었다. 


 나 같은 놈은 이런 공부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생각이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튀고, 마음 가는 데에 계속 마음을 쓰며 글을 쓰는 시간을 오래 보낸 나로서는, 그게 내 개성이라고 믿으며 틀을 비껴가려고 했다. 그랬던 내가 수험법학이라는 틀에 아주 제대로 갇혀 버린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선택한 로스쿨 입학이었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틀 안에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원래 인간이 인간다움은, 동물로서의 본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합치하는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틀을 벗어나려는 내 본성을 억누르고 하기 싫은 공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처음 마음먹었던 것들은, 입학하자마자 빠르게 박살 나기 시작했다. 입학 직전 겨울 동안 선행 학습을 제대로 하고 들어왔으면 괜찮았으련만, 세 달간 무슨 허송세월을 그리도 했는지 그 업보를 제대로 치른 게 나의 로스쿨 첫 학기이다. 


 그래도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다. 그건 누가 챙겨주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무지렁이 같이 느껴지니까. 초라해진 현재를 부정하고 싶어서 왕년을 들먹이는 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쩌다가 멋진 글을 봤다. 




법학도의 3가지 유형

독일의 법학자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는 법학을 공부하러 대학에 오는 젊은이들을 관찰해 보면 대체로 3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 부류는 학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남들이 법을 공부하면 결코 손해는 안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지망해 온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법언 “유스티니아누스가 명예를 준다”(Dat Justinianus Honored!)는 유혹에 끌려 ‘빵을 위한 학문’으로 법학을 선택한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별로 기대할 바가 못 되며, 이들이 설령 법률가가 된다 하더라도 국민 생활에 손해를 주면 주었지 이익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두 번째 타입은 지식만 발달하고 인격성이 부족한 젊은이다.
이들은 대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우등생들로서 부모의 권유에 따라 법과에 대한 선악을 가리지 않고 법과가 좋다고 하니까, 당연히 들어온 자들이다.
법학도가 된 그들은 실제적인 흥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냉정하고 논리적인 성격 때문에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
이들은 법학자가 되든 법률실무자가 되든 대체로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법률의 과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별다른 창조성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이들을 가리켜 전형적인 법률가라 하여도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라드부르흐에 의하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번째 타입이 있다.
그들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철학, 예술, 혹은 사회와 인도주의에 기울어지면서도, 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부득이 법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저술가나 학자와 같은 불안정한 生路를 선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예술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창작활동에 뛰어들 수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당분간 법학을 선택하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시간과 정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본래의 취미 방면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법학에 대해 고민을 깊이 하고, 때로는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끝까지 법학을 공부하고 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법학자와 법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종고 저, 법학통론 p 2~3, 1988, 박영사)




 이 글이 위로라면 위로였다. 스스로를 '세 번째 타입의 법학도'라고 정의 내렸다. "넌 뭘 할 줄 아는데? 저 글에 나오는 것처럼 예술을 해, 철학을 해?"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개성을 발현하면서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고, 세상 소식에 귀가 밝은 사람으로서 이 시간을 끝내 감내하면 얻게 될 달콤한 과실을 라드부르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희망하고 싶었다. 글의 말미를 몇 번 다시 읽었다. "이들은 법학에 대해 고민을 깊이 하고, 때로는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끝까지 법학을 공부하고 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법학자와 법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고의 시간을 겪는 자에게는 때때로 자기 최면이 필요한 법이다. 


 웃긴 것이, 로스쿨 면접 때는 수험생들에게 법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위의 훌륭한 글을 쓰신 라드부르흐 선생님은 법의 목적으로 크게 ① 정의와 ② 법적 안정성이 있다고 하셨다. 법학적성시험이 끝나고, 로스쿨 면접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정의와 법적 안정성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열심히 떠들어보는 한 철을 보낸다. 분명, 이런 것들을 생각이라도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차이가 있긴 할 것이다. 어느 유명 토크쇼에 출연한 법조인에게 사회자가 "법조인이 되고 싶어 하는 꿈나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 법조인은 "법을 공부하기 전에, 정의에 대한 의식을 갖추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법기술자가 아니라, 정의감을 가진 법률가가 되어야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라는 식의 답을 내놓았다. 그 말은 훌륭한 말이다. 


 면접에서 정의에 대해 물었던 로스쿨은, 로스쿨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정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도저히 주지 않는다. 그런 건 입학 전에나 하는 고민이다. 로스쿨은 '법학전문대학원'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인 대학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로스쿨은 기술을 배우는 직업전문학교에 다름 아니다. '법기술자 양성소' 말이다. 그렇다면, 토크쇼에 출연한 법조인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법기술자 양성소'인 로스쿨이 잘못된 것일까? 이 글에서 도입 취지를 상실하고 '법기술자 양성소'로 전락했다며 현행 로스쿨 제도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지금 말하는 건 이런 거다. 법기술자가 되려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여느 기술과 마찬가지로, 법 기술도 기술이다.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법학도가 배우는 기술은 미래의 의뢰인의 재산권이나 인권을 지키는 기술이다. 윤리 의식 있는 의사라고 해도 의술로써 생명과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면 말짱 황이다. 정의감 있는 변호사라고 해도 의뢰인의 재산권과 인권을 지키지 못한다면 맹탕에 불과하다. 정의가 먼저 되고, 법기술을 익히는 나중 일이 것도 훌륭하다. 법기술을 익히고 정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가서 고민하는 것도 틀리지 않은 길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다.


 이런 고민을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그렇다. 다 공부하기 싫어서이다. 그냥 공부하면 되는데, 이렇게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글로 토해내지 않으면 몸이 너무 근질근질한 사람이 나다. 그나마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기 위해,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을 때 이 공간에 가끔 들러 다시 예전처럼 글을 쓰기로 했다. 앞으로도 고민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이미 결론이 난 고민은 끝내기로 한다. 법기술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틀 안에서 열심히 달려야 한다. 다행히, 저번 학기보다는 틀 안에서의 방황이 많이 덜하다. 우선은, 법기술자가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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