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탁 창작소설 - 4
압록강 검문소의 훈철은 성일의 눈치를 살폈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캐리어는 분명 남한인의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이 손수레짐가방은 도대체 어쩌다 북조선으로 오게 됐단 말이오?”
성일도 이 짐이 오발송 된 것임을 알았다.
“가만있어 보오, 슬로베니아... 혹 유고슬라비야에서 갈라진 나라가 아니겠소?”
동구권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과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교류가 꽤 잦았기 때문에, 연배가 어느 정도 있는 성일은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유고슬라비야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소.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자기 식대로 살아보겠다고 한 나라였지.
로씨야의 눈치도 안 보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고 말이요.
지금은 나라가 흩어졌다고들 하지만, 그 정신만은 나한테 깊은 인상을 주었소.”
훈철은 성일이 떠드는 소리를 그저 듣고 있었다.
‘검문소에서 일하는 주제에 제법 아는 게 많다는 말이지.’
돗대까지 마저 다 피우더니, 성일은 유고슬라비아에 관한 회상을 멈췄다.
“아무튼 간에, 괴뢰 한국으로 가려다 잘못 온 손수레짐가방이 분명하오. 괜히 피곤해지기 싫으니 동무가 알아서 싹 없애버리시오. 동무만 믿고 가오.”
하여튼 간에 귀찮은 일은 다 훈철에게 맡기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무책임함이 훈철에게는 반갑게 느껴졌다.
훈철은 오발송 된 캐리어를 샅샅이 살폈다.
자주색 항공 잠바, 찢어진 청바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트렌치코트, 워커 신발.
여기서 입고 다닐 수 없는 옷가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훈철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몇 권의 책과 진탁의 일기장이었다.
훈철은 캐리어와 옷가지들을 소각장에서 태워 없앴지만, 책과 일기장은 집으로 가져왔다.
며칠에 걸쳐 훈철은 게걸스럽게 진탁의 책들을 먹어치웠다.
영화나 철학에 대한 것들이 주됐는데, 그 며칠 새에 훈철의 세상은 너무 커져버렸다.
‘이런 사상들로 무장한 동무가 쓴 글이라... 어지간한 건 아니겠구먼.’
모든 책을 읽은 훈철은 이제 진탁의 일기장까지 해치울 생각이었다.
일기장에는 진탁이 지난 몇 년 동안 류블랴나를 근거지로 하여 여러 국가를 다니며 취재한 내용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진탁은 고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욕을 일기장에 한가득 써놓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걸 보면, 분명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 게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진탁은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자주 느끼는 듯했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가족 외에 상급자인 성일이 거의 다인 훈철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씩 진탁이 쓴 희망에 대한 글을 보면서, 진탁을 이해해갈 수 있었다.
‘이 사람, 사람은 싫어하면서도 사람의 넋은 좋아하는가 보구만.’
훈철은 점점 진탁의 글에 빠져들었다.
진탁이 잃어버린 책이 훈철의 세상을 커다랗게 만들었다면, 진탁의 일기는 훈철로 하여금 다른 인간과 세계에 가닿고 싶게 만들었다.
일기의 끝부분은 신과 어떤 장군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것으로 보아 진탁이 가장 공들여 취재한 것임이 분명했다.
진탁이 지은 마지막 글의 제목은 <아이다와 라다메스>.
훈철은 몇 해 전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떠올랐다.
그 사랑이 너무 절절해서 울었고, 라다메스가 마치 자신인 것 같아 또 울었다.
‘기자랍시고 떠들 땐 입에 욕만 달고 살더니, 이 가슴 저미는 소린 또 어디서 주워왔단 말인가.’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라다메스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훈철의 마음에 꽂혔다.
검문소에서 일하는 내내 훈철은 라다메스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몇 해 전에, 그러니까, 세상이 이상할 때의 일이다.
세 달 동안 낮이고 밤이고 하늘이 붉기만 했다.
선전선동부는 이상한 말을 해댔는데,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이슬란드는 저 멀리 있고, 화산 폭발이 아무리 심해도 이 먼 조선 땅의 하늘이 이렇게 붉게 될 리 없으며, 세 달 동안이나 낮밤을 가리지 않고 그럴 일은 아니었다.
화산 폭발의 정도가 그렇게 심하면, 화산재가 유라시아 대륙을 덮어 추위가 극심해지고 하늘의 색은 탁하고 어두워야 했다.
정반대이지 않았는가.
고급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에 해당*)를 다닐 때 탐포라 화산 폭발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훈철은 이걸 기억해 냈다.
‘내게 탐포라를 가르쳐 준 건 공화국인데, 지금 공화국은 제 손으로 가르쳐준 것과 딴 소리를 하고 있군.’
하늘이 돌아오자 사람들이 이 일을 입에 담는 빈도는 확 줄었다.
훈철은 이 일을 종종 입에 담았으나 가족과 성일은 이제 이 일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당에서 설명한 대로 믿으면 편하니까.
당의 말을 믿지 않으면 뭘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 해의 하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훈철은 그 뒤로 당을 마음 깊이 불신하기 시작했다.
훈철은 공화국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대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훈철이 검문소에서 일을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국경에서 인민과 바깥세상의 교류를 차단하는 일을 맡았지만, 그 교류를 차단하기 위해 바깥세상에서 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게 훈철의 일이었다.
훈철은 진탁의 취재 일기를 읽으며 전율을 느꼈다.
진탁의 글에 따르면, 신이 불타는 바위의 폭포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자 온 세상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 기간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신이 있다는 것,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 겨우 아이다와 라다메스의 사랑을 제물 삼아 불타는 바위의 폭포수를 거두었다는 것 모두 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하늘에 관해서는, 화산 폭발보다 불타는 바위의 폭포수가 더 설명이 잘 들어맞았다.
훈철은 진탁을 만나 어떻게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를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