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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23. 2021

느린 바쁨

Day 27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였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차가 막혔다. 택시기사는 자꾸만 가리워진 도로 건너편을 보려고 했다. 앞에 무슨 일이 있나봐요. 원래 막히는 길이 아닌데. 택시기사가 말했고 나는 문득 작년 일을 떠올렸다. 외부 프로그램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던 때였다. 시간이 퇴근 즈음이었다. 다만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행사 비품을 정리해야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퇴근길 도로에는 역시나 차가 많았다. 나는 얇게 진동하는 차창 너머로 붉게 저무는 하늘을 쳐다봤다. 택시 안의 고요 속에서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난 뒤에는 차라리 늦장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기사님 편한 길로 가주셔도 되어요. 계속 두리번거리던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주말이었다. 외부 행사에 모니터링차 참석한 날이었다.


서울 외곽의 아파트 단지였다. 주민들이 직접 개최한 축제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내 일은 축제 장면을 기록하고 향후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함께 방문하기로 한 팀원은 나보다 삼십 분은 일찍 도착해서 이미 현장 업무를 돕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 축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현장 업무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나는 모니터링을 할 때는 되도록 프로그램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다만 팀원은 너무 적극적이었다.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직접 리플렛을 쥐어주며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돼요. 목위까지 나온 말을 삼켰다. 괜히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게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다. 최선의 정도는 어디까지 일까. 적당히라는 말도 꼭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귀가하는 택시에 팀원과 함께 탔다. 정체된 도로 위에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우린 실 없는 말들을 나누었다. 각자의 사는 이야기였다. 새로 시작한 모임에 관한 이야기. 일에 대한 말도 꺼내려다가 말았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주제는 나의 고민으로 흘러갔다. 팀원은 내게 일 년 후임이었다. 우리를 선후배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연차였다. 어느 날 회사에서 내게 관리자 역할을 요청했다. 상급자가 개인 사유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시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관계 형성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팀원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회사 생활은 먹고 살려는 일이다. 시키니 하게 되고 늘 뒷맛이 찝찝했다. 나는 역할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가스라이팅은 개인의 성품보다는 관계의 형태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종종 우리는 자신과 타인이 놓여있는 지형을 살펴야 한다.


부끄럽게도 내가 팀원에게 주었던 여러 피드백은 모두 별뜻 없는 말들이었다. 단지 내 스타일을 팀원에게도 고집했던 게 아닐까. 조용한 택시 안에서 나는 팀원에게 낯뜨거운 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느끼는 게 많았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려고요. 팀원이 대답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왜 그러세요. 아직 대낮이에요. 우린 멋쩍게 웃었다. 뜻도 없이 속 이야기를 꺼내버렸으나 여전히 도로는 길게 막혀있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너무 오랫동안 들었다. 생각을 조금 고쳐 해본다.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최선의 노력이 실패나 헛수고를 아우르듯이. 말하자면 최선은 효율보다는 정성에 가까운 뜻이다. 일에 정성을 들였는가. 이건 일을 잘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일을 마칠 때에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냐는 뜻이다. 새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애인이 다녀온 면접은 결과가 좋지 않다고 했다. 표정이 심란했다. 앞으로 몇 개월을 더 우리는 가난과 가깝게 걸어야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애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세상이 망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린 다시 제몫의 일을 구하고 일한만큼의 값을 받으며 살지 않을까. 긴 걱정을 거두어도 좋았다. 나는 정성에 관하여 생각했다. 정성껏 살면 될 것이라는 안심이 뒤따랐다.


다시 지난 해에 사무실로 돌아가던 택시를 떠올렸다. 그때  옆자리에는 이제 퇴사한 직원이 앉아있었다. 그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게 일련의 사건들로 하여금 더는 이 일을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하면 된다는 말 따위는 너무 무책임할 것 같았다. 우리는 늦은 오후의 택시 안에서 불안을 느꼈다. 다만 어딘가 차분한 불안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말대로 회사를 떠났다. 며칠 전에는 다른 동료를 통해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직종을 바꾸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행스러웠다. 그때 택시에서 어영부영 짐을 꺼내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트렁크를 다자 차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다시 퇴근길의 무수한 차들이 나래비 선 도로 안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너무 많은 차들은 조금씩 움직였다. 느리지만 모두가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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