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8
선배가 떡을 줬다. 덕분에 결혼식 잘 치뤘어.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형 정말 축하드려요. 햇살이 들이치는 예배당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겠으나 여전히 텔레비전에서는 확진자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선배는 떡이 든 작은 상자 두 개를 건네 주었다. 하나는 애인의 몫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상자를 가지런히 포개서 손에 들었다. 선배는 가만히 내 손을 쳐다봤다. 가방이 없구나? 마침 짐을 들고 오지 않은 날이었다. 들고 가면 돼요. 괜찮아요. 그러자 선배는 종이백에 쌓여 있던 떡들을 모두 밖으로 꺼냈다. 여기 담아서 가. 괜찮다니까요, 선배. 조그만 박스들이 어느새 수북하게 쌓였다. 선배는 어차피 버릴 것이라며 종이백을 손에 쥐어줬다. 나는 선배에게 받은 떡 두 상자를 나란히 담았다. 커다란 종이백이 넉넉히 남았다.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남아 서로의 소식을 나눴다. 나는 죽어가는 화분에 관해 말했다. 고작 세 달만에 내 키만한 홍콩야자는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래. 누군가 말했다. 너무 사랑을 주면 오히려 병이 나요. 그는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픈 얘한테 영양제도 주고 거름도 줬던 적이 있는데 오히려 잎이 더 노랗게 변하더라고. 그게 영양과잉이래요. 그는 말하지 못하는 생명을 키우는 일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목이 마른지 아닌지 말해주면 얼마나 편하겠냐며. 차라리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키우는 게 더 나을 거 같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선배가 웃었다. 말이 통해서 더 힘든 거예요. 크게 웃는 이들은 모두 자녀가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근처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교회 근처에 살던 아이였다. 우리는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그전에는 교회에서 알던 사이였다. 그 친구는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교회의 실무자였다. 학교를 다니며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한다는 걸 알았다. 사실 대낮부터 실존과 타자에 대한 수다를 떠는 사람은 드물다. 오래 전부터 친구와 나는 철학에 관해 대화하길 좋아했다.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에서 친구는 얼마 전에 다녀온 전시에 대해 말했다. 증강현실을 이용한 전시라고 했다. 관객은 태블릿을 들고 전시장에 입장한다. 태블릿의 후면 카메라로 바라보는 전시공간에는 가상의 작품들이 걸려있다. 관객은 태블릿을 통해 작품을 훼손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다. 관객에 의해 모습이 바뀐 작품은 그대로 유지된다. 다음 관객은 앞선 관객에 이어서 다시 작품과 상호작용한다. 흔한 관객참여형 전시일 수 있겠으나 증강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특이사항이었다. 전시 해설에는 온갖 심오한 단어들이 동원되어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인상을 찌푸렸다. 작품이 너무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마치 대단히 새로운 작품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었으나 전혀 새로울 게 없었다고 했다. 무수한 신기술과 그 신기술에 대한 미사여구가 불편한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새롭다는 거지. 친구가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었다. 세상에 새로울 게 어딨을까. 그런데 그게 왜. 이미 빛 바랜 것들이더라도 새롭다는 말 좀 쓰면 안 되나. 증강현실을 이용한 시시한 전시가 그렇게 잘못일까. 나는 친구의 말꼬리를 물고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계속 떠들었다. 실은 이런 대화도 새롭지 못했다. 이미 비슷한 말들로 수십 여번은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질수록 괜히 길을 잃는 기분이 되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길을 잃고 싶어지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대신 나는 친구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선배가 준 떡이었다. 선배는 친구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친구에게 대신 떡을 전해달라며 내게 하나를 더 주었다. 이거 선배가 준 떡이야. 이번에 결혼했잖아. 친구가 물었다. 그분이 누구지. 친구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다 선배는 친구를 알게 됐을까. 정작 친구는 한 번도 선배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나는 한 사람만 아는 관계에 대해 생각했으나 친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떡을 들고 카페를 나왔다. 서로 헤어지고 여전히 한낮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때 새로움에 관한 우리의 긴 논쟁은 논리실증주의에까지 이르렀다. 문득 나는 유명한 격언을 떠올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문장이었다. 그건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일까. 그러니까 우린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 단호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죽어가는 나의 화분에 대하여. 실은 나는 화분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존재라고 느낀 적 없다. 도리어 내게 계속 말을 거는 듯한 느낌에 괴로웠다. 나를 원망할까. 당연히 화분에게는 목소리가 없다. 그러니 화분의 말들은 어디서 올까.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는 알지 못한다. 침묵하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너무 많은 사랑을 거두라던 교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